대통령이 현장서 정책 방향
결정, 이후 관료들 정책 개발
국회에도 정부에도 방향 설정
정책 조율에 전문가 안 보여
누구나 전문가 될 수 있다는
착각, 사이비 전문가도 판쳐
전문성 존중 사회적 기제 필요
결정, 이후 관료들 정책 개발
국회에도 정부에도 방향 설정
정책 조율에 전문가 안 보여
누구나 전문가 될 수 있다는
착각, 사이비 전문가도 판쳐
전문성 존중 사회적 기제 필요
대통령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민생토론회를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대통령이 화두를 던지고 토론에 참여한 기업과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현장에서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한 뒤 해당 부처에 정책 개발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잘하면 사회적·경제적 약자의 관점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실효성 높은 정책을 개발할 수도 있다. 관료주의와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빚어지는 정책 입안의 지연을 막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지엽적인 접근을 통해 개발된 정책은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면서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정부가 사안별로 시장에 개입하다 보면 자유시장주의라는 정부의 정책 기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기술의 진보가 견인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외신들은 한국 경제가 구조적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지만, 과거의 패러다임에 매몰돼 구조 개혁에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책 개발을 위해서는 현장의 정책 수요를 파악하는 단기적 관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비전을 제시하고 구현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의 지원과 일부 희생을 설득하는 장기적 관점의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구조 개혁 과정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과 분야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영역별로 발생하는 정책 수요를 국가경제의 틀 속에서 조율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역할이 요구된다. 하지만 패러다임 전환에 대응하기 위한 노동, 조세, 교육, 연금 개혁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의료 개혁까지 관련 정책들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정부에도, 국회에도 전문가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전사의 모습으로 내달리는 대통령 그리고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는 관료들만 보일 뿐이다. 전문가 집단의 견해가 배제되는 정부의 정책 결정은 현 정권의 통치 스타일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대중의 집단지성에 가치를 두는 사회적 현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문재인정부가 에너지 정책과 부동산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보았듯 전문가가 배제되는 정부의 정책적 의사결정은 현 윤석열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분업화와 전문화를 기반으로 산업사회가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숙련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을 축적한 전문가 집단의 견해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세분화된 영역을 연계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전문성으로 포장된 편향된 지식을 가지고 정치적 갈등에 편승해 경제적·정치적 욕구를 채우려는 비윤리적 전문가들이 늘면서 사회 갈등은 오히려 심화하고 있으며 객관성이 부족한 전문가의 견해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다양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스스로 전문가라고 착각하며 전문가의 지식을 자신의 견해로 대체하는 사이비 전문가가 늘고 있다. 이들이 전문가에 대한 신뢰 추락에 한몫하고 있다. 이제 대중에게 전문가란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일정 수준의 지식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대중들의 정치적 편향성과 기득권을 누려온 전문가 집단에 대한 반감, 그리고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가 전문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왜곡된 믿음 등이 맞물리면서 전문가 수는 늘고 있지만 진정한 전문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하지만 정치적 논리에서 벗어나 전문가의 전문성이 충분히 반영된 정책이 만들어지지 못하면 시장은 균형을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면 정치 지도자를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구세주 콤플렉스’에 편승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 우익 극단주의자, 낭만주의적 무정부주의자 등 시대에 뒤떨어진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유토피아를 꿈꾸는 혁명가들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최소한 정부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존중하고 전문가들이 정치적 논리에 휘둘려서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그들의 전문성을 보호하는 사회적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
박희준(연세대 교수·산업공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