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채상병 특검법’이 정부로 이송된 지 14일 만인 21일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거부권 행사 시한(22일)을 하루 남기고 이뤄진 결정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번 법안이 특검 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보면서도, 여론을 포함한 각계 의견을 들으며 마지막까지 숙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취임 이후 여섯 번째, 법안 숫자로 따지면 열 번째다. 대통령실은 채상병 특검법 거부가 ‘불통’ ‘방탄’ 이미지를 주고, 총선 이후 강조한 협치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채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실, 국방부, 해병대 사령부, 경찰 내 은폐·무마·회유 등 의혹을 수사 범위로 명시하고 있다. 특검 요구 여론이 높은 점, 사태 초기 윤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진 점도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윤 대통령은 ‘여야 합의 없는 특검’이라는 나쁜 선례를 남기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고 결론지었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번 특검 법안이 왜 헌법상 삼권분립 원칙에 위반되는지 여러 차례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우리 헌정사에 여야 합의 없이 특검법이 강행 처리된 적이 없었다”며 “재의요구를 당연히 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재의요구를 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채상병 특검법 거부 결정은 다수 여론과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다만 대통령실은 정치적 부담을 알면서도 원칙을 택한 것이며, 진상규명을 막으려는 의도가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여야가 합의해 넘어온 특검 법안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수용하리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대통령의 외압 부분에 대해서는 수사 당국이 그 실체적인 진실을 규명해야 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번 법안에 담긴 비정상적 특검 설계 구조나 ‘정치공세’를 거부했을 뿐, 야당의 특검 추천권 독점 등 ‘독소조항’이 고쳐지면 특검 도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도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만약 국민들께서 ‘봐주기 의혹이 있다’ ‘납득이 안 된다’고 하시면 그때는 제가 ‘특검 하자’고 먼저 주장하겠다”고 말했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조건부 수용’이라는 말은 오히려 맞지 않는다”며 “기존 특검들처럼 원칙대로 추진되기만 한다면 수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채상병 특검법 재의요구안과 오동운 신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임명안을 동시에 재가한 점을 강조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날 오전 오 처장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여야 합의로 채택했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여야 합의로 공수처장 임명에 동의하면서 한쪽에서는 공수처를 무력화시키는 특검법을 고집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공수처가 수사 속도를 낼 것”이라며 “‘먼저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대통령 말은 거짓이 아니다”고 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