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특별한 해였다. 그해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3개월 뒤에는 잠들어 있던 법 하나를 깨웠다.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높았던 1962년 제정된 무역확장법이 그것이다. 이 법은 ‘자유주의 국가와의 경제적 유대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특정 수입품이 미국 안보를 침해하는지 조사하고 수입량 제한, 고율 관세 부과 등의 강력한 제재를 내리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한다. 미국은 냉전시대의 퇴장과 세계무역기구(WTO) 설립 등으로 ‘이유’가 사라지면서 1982년 이후 이 법을 휘두른 적이 없었다.
트럼프는 2018년 3월 8일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10~25% 관세를 매기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같은 달 23일 0시1분부터 시행에 들어가면서 보호무역, 무역전쟁이라는 뉴노멀에 불을 지폈다.
트럼프의 이 결정이 상징적인 건 ‘안보’를 위협하는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매길 수 있게 한 232조를 썼고, ‘안보’를 핑계로 손쉽게 건드릴 수 있는 철강·알루미늄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뺏는다고 외쳤던 그는 ‘경제적 유대 강화’ 자리에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를 집어넣었다. 경제안보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썼다. 경제와 안보의 기묘한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경제와 안보가 만난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인류사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경제적 수단을 쓴 사례는 자주 있었다. 그래서 194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을 포함한 23개국이 맺은 ‘가트’(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에도 안보 예외 조항(21조)이 들어 있다. 다만 경제안보라는 모호한 개념은 1950년대 이후 쇠퇴했었다. 상품·자본·사람의 이동과 교류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자유주의 국제경제 질서가 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경제적 효율성이 안보를 압도하면서 경제와 안보의 연결고리는 차츰 약해졌다.
여기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 게 2017년이다. 트럼프는 국가안보라는 이름 아래 무소불위의 보호무역 조치를 쓸 수 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 번 벌어진 틈새는 넓고 깊은 참호를 형성했다. 트럼프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조 바이든은 중국을 무차별 폭격하는 동시에 동맹국들에 ‘미국에 투자하라’고 압박한다. 유럽연합을 비롯한 주요국도 맹렬하게 참호를 파고 있다. 트럼프의 귀환이라는 태풍도 다가온다. 여기에다 ‘참호 파기’는 다자무역 규범과 맹렬하게 충돌 중이다. 세계경제는 블록경제로 쪼개질 조짐을 보인다. 새로운 무역질서의 탄생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경제에 절체절명의 위기다. 자유무역이 사라지는 자리에 똬리를 트는 보호무역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경제와 안보가 융합하는 새 무역 질서가 만들어지는 시대에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공급망 관련 최초의 다자간 국제협정이라 평가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공급망 협정’이 좋은 예다. 미국이 주축인 IPEF는 대표적 경제블록이자, 안보블록이다. 최근 만난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는 공급망 협정의 규범·초안을 잡는 데 한국이 ‘큰 몫’을 했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를 겪으면서 대응 방안이나 체계를 갖춰본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도권’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돌이켜보면, 한국은 국제무역 체계에서 한 번이라도 주도권을 쥐어본 적이 없다. ‘참가자(플레이어)’에 머물 것인가, ‘주관자(호스트)’가 될 것인가. 국내 정치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살 문제는 더 다급하다. 수많은 참호와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국가 역량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샅바’를 단단히 잡아야 할 때가 왔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