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검사 대통령’의 동문서답

입력 2024-05-14 00:38

“제가 연초에 KBS 대담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들께 걱정 끼쳐드린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고 있다.” 인간의 뇌는 반복되는 정보를 지우고 차이만 인식한다던가.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 후 뇌리에 남은 건 ‘현재진행형’ 사과 한 문장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종결어미 때문이다. 듣다가 ‘진짜 사과하기 싫었나보다’ 웃음이 났다. KBS 대담 얘기도 의아하긴 했다. 그때 대통령은 사과도, 해명도 안 했다. ‘아내가 몰카 정치공작에 당했다’며 억울해했다. 이후 공권력이 움직였다. 수사 대상은 명품백 ‘받은’ 여사 대신 ‘준’ 목사. 이번 사과에도 소환조사는 착착 진행 중이다.

기이한 사과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의 전부는 아니었다. 대부분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이었지만. 이를테면 국정기조 중 ‘고칠 건 고치고 지킬 것은 지키겠다’거나, 의사파업 장기화에도 ‘의료개혁은 로드맵에 따라 뚜벅뚜벅 걸어나가겠다’는 답변, 러시아와는 ‘협력할 건 협력하고 반대할 건 반대하면서 잘해보겠다’ 같은 말들. ‘무엇을’과 ‘어떻게’가 빠진, 뭘 기대했든 기대보다 맥빠진 답변이었다.

게다가 진짜 중요한 질문은 나오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뻔한 특검법 거부 논리 말고 국민들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대통령실이 국가기록물이라고 주장한 명품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대통령이 여사의 명품백 수수를 인지한 시점은 언제인지, 인지한 뒤엔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검찰이 부르면 여사는 언제든 소환조사에 응할 건지. 그뿐인가. ‘채 해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에도 질문이 한보따리다. 대통령은 2023년 7월 31일 오전 국방장관과 통화했는지, 통화해서 혐의자 축소와 이첩 보류를 지시했는지. 최소한 ‘수사 중이라 답할 수 없다’는 답이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나마 한 대목은 눈에 띄었다. 대통령이 한 말이 아니라 하지 않은 말, 언론이 동문서답이라고 비판한 답변이다. 회피성 동문서답에는 채 상병 사건을 보는 대통령의 억울한 마음이 읽힌다. 윤 대통령은 해병대수사단 결론에 대한 ‘VIP 격노설’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수사를 하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책임 있는 사람을 봐주고 또 책임이 없는 사람한테(…)뒤집어씌우고 이런 것 자체가 저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한 수사는 대통령실 외압의혹 수사가 아니다. 채 해병 사망사건 책임자를 가리는 경찰 수사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수사를 하면 내가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게 입증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행간을 재구성해보자면 대통령은 해병대수사단 결론이 잘못됐다는 수사가 나오면, 즉 채 해병 죽음에 대한 사단장의 결백이 밝혀지면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라’는 외압의혹 자체가 무너질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 경우 VIP 격노의 진위는 진상 규명 과정에서 벌어진 지엽적인 사건이 된다. 수사는 하나마나다.

물론 추측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채 해병 사망 책임의 상한을 어디에 두는지 우리는 모른다. ‘VIP가 사단장을 빼라고 지시했다는 사령관 전언을 들었다’는 건 해병대수사단장의 일방적인 주장이다. 다만 합리적 의심은 있다. 수사단장 진술서를 보면 국방부 측은 책임자를 ‘직접 물에 들어가라고 말한 대대장 이하’로 엄격하게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건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한다던 이태원 참사 직후 대통령 발언과도, 그후 굳건하게 지켜온 이 정부 인사 원칙과도 부합한다.

그래서 채해병 특검법은 더 중요해졌다. 특검법 없이 채 해병 사망의 진실은 오롯이 경찰 손에 놓이게 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휘하의 그 경찰 말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