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박탈감 큰 사회는
예의와 염치가 실종된 탓
갑질·내로남불·정치적 적대
넘치는 것도 예를 팽개친 때문
연대와 공존 위한 배려와 양보
역지사지의 공감능력 절실
예의와 염치가 실종된 탓
갑질·내로남불·정치적 적대
넘치는 것도 예를 팽개친 때문
연대와 공존 위한 배려와 양보
역지사지의 공감능력 절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절대성에 기초한 뉴턴의 고전역학이 갖는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물리학의 지평을 넓혔다. 현대 물리학은 상대성과 절대성의 이분법을 넘어 양자역학으로 진화했다. 사회과학 분야에선 아무래도 상대성이 더 중요하다. 경제학은 절대가격보다 상대가격을 중시한다. 사회학이나 정치학도 마찬가지다. 절대빈곤과 상대빈곤 모두 문제지만 정치적·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 늘 상대빈곤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온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생물학적 절대빈곤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치·사회적 상대빈곤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고 본다.
상대빈곤 문제는 곳곳에서 정치·사회 문제로 비화한다. 2023년 기준 경제 규모 세계 14위, 1인당 국민소득 3만4000달러의 대한민국에서 특히 그렇다. 70년 만에 소득은 약 500배 증가했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오히려 늘었다. 여러 국제기관이 내놓는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중위권에 갇혀 있다. 지난 3월 유엔이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지’, 삶을 자기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 타자에 대한 ‘관용’ 등 항목은 조사 대상 143개국 중 80~90위권이다. 국내의 한 연구에 따르면 연소득 8000만원 이상 고소득 가구 구성원 중 76%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12%는 하층으로 여긴다.
요즘 화가 단단히 나 있고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다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는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누구는 세상의 인(仁)이 사라졌다고 장탄식이다.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사는 게 힘들다는 이들도 많다. 대부분 자신의 아래보다는 위와의 차이가 큰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일 것이다. 치미는 화와 상대적 박탈감의 연결고리는 예의와 염치의 실종이다. 그간 우리 사회 특유의 혈연-지연-학연 관계망을 통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신사협정이 유지됐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진영 논리’ 속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 22대 총선이 드러냈듯 길을 가다가 마주치는 둘 중 하나는 나와 다른 진영일 확률이 높다. 같은 진영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반대 진영이라면 혈연-지연-학연 가리지 않고 적대한다.
예의와 염치가 없는 세상은 늘 시끄럽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이들에게는 무례하게 굴고 갑질을 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운전대만 잡으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나 이면도로에서 보행자를 윽박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가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미생이다. 여기에 더해 내로남불의 전형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정치 엘리트는 하나같이 정의와 공정을 외치지만 남는 건 피해자 코스프레나 위선의 메아리뿐이다.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등 혐의로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한 야당 대표는 며칠 전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 대해 ‘네 글자 혹평’을 했단다. 영어에서 네 철자 단어(four-letter-word)는 ‘욕설’을 뜻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내가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인 예를 가장 먼저 팽개쳤다. 과거 수구 유학자들이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예학(禮學)을 오남용하면서 수단으로서의 예가 목적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예의와 염치의 수단적 의미는 극기복례, 즉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는 공자님 말씀에도 드러난다.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 매일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가지 않겠나. 인의 실천은 자신에게 달렸지 남에게 달린 게 아니다. 따라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아라.” 맹자는 이를 “사양하는 마음이 예의 실마리”라고 풀었다.
의무감이 사라지고 권리의식만 강해진 세태 속에서 사회 연대와 공존에 필수적인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 사라진 후유증이 크다. 역지사지의 공감능력 부재는 정치와 사회의 엔트로피 증가로 이어지며, 물리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의 극대화는 생명체의 소멸을 초래한다. 양자 중첩 상태의 입자 단위 미시세계가 아닌, 여전히 상대성 원리가 지배하는 인간 세계에서는 극기복례를 통한 엔트로피 감소가 가능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구민교(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