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영화를 공부하러 온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K팝이나 한국 문화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우연히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만난 한국 친구들이 좋아서 서울에 몇 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친구는 영화와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데 직접 연출을 하고 싶어 했다. 영화과 대학원의 할리우드 독립영화 수업에서 그를 만났을 때 “왜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할리우드 영화 공부를 하는 거야?”라고 묻자 그는 “나도 몰라”라고 답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친구의 이름은 제임스다. 제임스는 칠 년 정도를 한국에서 살다가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래 있으면 그곳을 떠나야 하는 거야.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면 안 되는 거야. 그는 한국말로 이렇게 말하고 떠났다. 그 말이 그가 떠난 뒤에도 계속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렇게 말하는 제임스는 몸도 마음도 무척 가벼워 보였다. 모두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로 몸을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임스가 영어가 모국어인 백인 남성이라는 특권 계층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 그렇지는 않다는 점에서 제임스의 유별난 점이기도 할 것이다. 제임스는 한국어를 무척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곳에 영원히 살 사람처럼 살다가 떠난 셈이다.
반드시 국가를 옮기거나 지역을 이동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떠나는 일은 언제나 필요한 것 같다. 자주 가던 카페를 바꾸거나, 다른 방으로 침대를 옮긴다거나, 직장을 바꾼다거나 하는 일들은 타성에 젖고 익숙해진 몸의 흐름을 변경시킨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아주 오랜 시간 유목 생활을 했다. 역사를 통틀어 정착 생활을 한 기간이 훨씬 짧다. 흔히 변화란 두려움과 불안을 야기한다고 여겨지지만 오히려 더 익숙하고 안정적인 삶의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제임스를 떠올리며 했다.
김선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