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용배 (4) 새벽기도가 유일한 낙… 일하는 틈틈이 성경 읽고 힘내

입력 2024-05-06 03:06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도회지로 나가 돈벌이에 나섰다. 경주 불국사 앞 코오롱호텔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원으로 일하던 박용배 목사.

나의 고향은 경북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이다. 우리 마을은 춘산면에서도 가장 후미진 골짝 동네였지만 교회는 일찍이 1906년 1월 5일 세워졌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고 고문당하다 순교하신 권중화 전도사님이 효선교회와 주변 6개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일찍 세워진 마을이라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었고 거기서 수많은 목회자가 배출됐으며 김수한 의원(전 국회의장) 같은 정치인도 나왔다.

지독하게 어려웠던 어린 시절, 하나님은 나를 연단하시고 인도하셨다. 네 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도박까지 하면서 논밭과 집까지 다 날렸다. 형님들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모두 객지로 나갔고 누나도 객지에 돈을 벌러 가려 하다가도 병든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하고 차마 나갈 수 없어서 집에 남았다. 누나는 살림하고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 남의 집 밭일을 하며 연명했다. 가난한 형편에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초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로 진학했지만 나는 고향을 떠나 대구로 나와 중국집 배달부로 일하게 됐다. 체구가 왜소했던 나는 중국집 배달통을 양손에 들고 배달을 다니는데 배달통이 커서 땅에 닿았고 무겁고 힘들었다. 열네 살 때부터 대구 봉덕동 미8군 후문 앞에 있는 중국집에서 배달부로 일했다. 이후에는 대구의 만둣집을 다니며 주방에서 일하다가 동성로에 있는 경양식 식당과 포정동 음악다방에서 커피 뽑는 일을 했다. 향촌동에 있는 맥주 홀에서는 웨이터 보조원으로 잠시 일하다 경주의 불국사 앞에 있는 코오롱호텔이 오픈할 때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로 일하기도 했다.

열여섯 살 때는 중국 화교가 운영하는 만둣집 주방에서 일하는데 너무 외로워 교회에 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당 옆집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드리던 것이 너무 그리워 교회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잠을 덜 자고 새벽기도를 나가면 되겠다는 마음에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종일 힘들게 일하고 새벽에 일어나지 못할까 싶어서 잠들기 전에 물을 많이 마셨다. 이렇게 하면 소변이 마려워 새벽에 깰 거로 생각했다. 나는 일하는 틈틈이 성경을 읽으며 힘을 얻었고 새벽 기도를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새벽예배는 날마다 감격이었고 그때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 저를 기억해주세요”라며 기도했다.

열일곱 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에 갈 일은 없어졌다. 명절이 되면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에 갔는데 나는 갈 곳이 없었고 그저 성경을 읽으며 명절을 쓸쓸하게 보내곤 했다. 하지만 어디서 일하든지 항상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주일성수 하면서 십일조를 온전히 드릴 수 있고 믿음 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저의 앞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청소년 시절 타락하지 않게 보호해 주셨고 성경 말씀과 새벽예배로 은혜받게 해주셨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