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근한 미소의 소유자인 김운자(77)씨는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내 미소를 지은 김씨는 5개의 파일철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파일철에는 어린이양육기구 국제컴패션을 통해 연결된 양아버지 윌리엄 베이커씨와 추억이 담긴 사진이 스크랩돼 있었다. 또 2012년부터 한국컴패션(대표 서정인 목사) 후원자로 활동하며 인연을 맺은 후원 아동들에 대한 사진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김씨는 최근 서울 용산구 한국컴패션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컴패션은 제가 갈 수 없는 나라의 아이들을 모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후원 활동은 결국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것이자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최근 르완다의 가테테 베다스테(20)와 행복한 작별을 고했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김씨는 지난 3년간 가테테를 마음에 품고 그가 자립할 때까지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업에 종사하며 자립하게 된 가테테는 컴패션 어린이 양육 프로그램을 수료했으며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남편 장세종 목사를 도와 지난 40여년간 목회 활동을 하다 2013년 은퇴한 그는 형편이 넉넉해 후원 활동을 하는 건 아니다. 김씨는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고 선교사인 자녀와 손주들까지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원 아동을 돕는 금액이 한국에선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제 삶 가운데 지출을 줄이고 줄이면 아이들의 손을 잡을 수 있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런 후원 활동에는 그가 양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도 한몫한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김씨는 1963년 열여섯 살에 미국인 후원자 베이커씨를 만났다. 아버지의 얼굴도 사랑도 받지 못했던 김씨는 베이커씨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베이커씨로부터 오는 선물과 사랑의 편지는 성인인 대학생이 됐을 때도 지속됐다. 복음을 위한 지도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한 뒤에도 매달 100달러(당시 약 2만원)의 후원금을 받았다.
김씨는 1969년 9월 대학에 들어간 딸을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베이커씨와의 첫 만남을 잊지 못했다. “10여년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빠’라고 불렀기에 처음 만났을 때 ‘아빠’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2박3일간 함께 보냈는데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참 많이 울었죠.”
김씨는 목회 활동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었던 2012년 우간다의 샤론과 케냐의 가체리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의 디아나, 가테테 등 전 세계 컴패션 어린이들의 ‘어머니’가 됐다.
그는 “어린이의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에 심겨 있는 복음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허락하는 한 계속 컴패션 어린이들의 손을 잡아줄 것”이라며 “어릴 적 가졌던 선교사의 꿈을 컴패션을 통해 대신 이루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고 전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