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문해력 빈국의 해법

입력 2024-05-02 00:35 수정 2024-05-02 00:35

얼마 전 인터넷에서 ‘웃픈’ 촌극이 벌어졌다. 웃기지만 슬프다는 뜻의 요즘 말이 딱 들어맞는 일이었다. 처음 접하면 피식 웃게 되지만 생각할수록 슬프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은 유튜브에서 시작됐다. 구독자 185만명의 국내 유명 코믹 채널 ‘너덜트’에서 올린 배우 모집 안내문이 발단이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안내문이었는데 모집인원을 ‘0명’이라고 적은 게 문제가 됐다. 한 자릿수 배우를 뽑겠다는 뜻이었건만 일부 젊은 네티즌은 그렇게 알아듣지 못했다. 이들은 “0명 모집한단다 ㅋㅋ”라거나 “0명을 뽑아? 이거 구독자 기만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댓글을 달았고 급기야 SNS에서 너덜트의 무개념을 성토하고 나섰다. 애초에 숫자 0이 아니라 영어 대문자로 ‘O명’을 썼다면 오해를 일으키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O명을 쓰든 0명을 쓰든 모집 공고이니 한 자릿수 인원을 뽑겠다는 소리로 알아듣는 게 당연하다는 여론에 밀리고 말았다.

자, 여기까지는 웃긴 이야기. 여기서 끝났다면 우린 그냥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커졌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0명 뽑는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자 너덜트 유튜브를 찾아가 “왜 0명밖에 안 뽑죠? 실망이 큽니다”라며 정색하는 사이버 친구들이 속출했다. 몰라서 실수했다면 멋쩍게 웃은 뒤 깨달으면 그만이련만 모르면서도 당당하고 오히려 분노하니 슬프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라는 반응이었다.

너덜트 채널에는 2주 만에 3000개 넘는 댓글이 쌓였다. 처음엔 정말 0명을 뽑는 것으로 오해하고 너덜트를 비판하는 의견이 오르다가 점차 ‘문해력 제로’에다 무식함을 인정하지 않고 우겨대는 요즘 세태를 걱정하는 댓글로 대체됐다. “모르면 알아보거나 물어보기라도 하지, 왜 이렇게 멍청한 게 당당한 시대가 됐지?”라거나 “요즘 친구들은 ‘내가 모를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안 하는 것 같다. 정보가 넘쳐나니 ‘내가 모르는 것=잘못된 것’이 된 걸까”라는 한탄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부끄러움을 넘어 처참한 수준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일 연휴를 ‘사흘’로 쓴 기사에 달려가 “왜 4일이라고 쓰느냐”고 따지거나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알아듣고 숙제를 제때 못했다는 하소연이 있었다. ‘심심(甚深)한 사과’ 표현에 격분해 “왜 지루하게 사과하냐”며 공격하는 일마저 있었다. 학교에서도 아우성이다. 선생님이 ‘이괄의 난’을 설명하는데 ‘선생님, 난이 뭐예요’라거나 ‘가제(假題)’를 듣고는 “그거 랍스터예요?”라고 묻는 고등학생까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중학교 3학년생 2405명을 테스트해보니 무려 27%가 문해력 미달이었다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는 읽기 2수준 미만(하위 성취)의 15세 한국 학생 비율은 2000년 5.7%에서 2022년 15%로 급증했다. 쉬운 한글 덕분에 문맹률은 낮지만 정작 글은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해력 빈국이 된 셈이다.

문해력을 키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독서다. 이미지나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긴 글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대신 책을 잡게 해야 한다. 마침 서울시가 11월 10일까지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청계천 등지에서 서울야외도서관을 운영한다. 휴장 없이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독서 공간을 제공한다고 하니 가족 나들이 겸 온 가족이 서울광장에서 푹신한 빈백에 둘러앉아 책을 펼치면 어떨까. 우리 아이를 기초적인 단어조차 모르면서도 오히려 남 탓하는 아이로 키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