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이 2008년 출범시킨 저비용항공사(LCC) 진에어는 몇 년 만에 성장의 한계를 느끼고 사이판 취항을 검토한 적이 있다. 사이판은 아시아나항공의 단독 노선이었다. 당시 조양호 그룹 회장은 “같은 나라 항공사끼리 제 살 깎는 경쟁을 해선 안 된다. 어렵더라도 국내 항공사가 들어가지 않은 노선을 개척하라”고 했다. 그래서 진에어가 2012년 국내 최초로 뚫은 지역이 라오스(직항 정기노선)다. 조양호 평전 ‘지구가 너무 작았던 코즈모폴리턴’을 통해 처음 공개된 이 일화는 국내 항공산업에 대한 조 회장의 애정과 책임감, 단기이익에 집착하지 않는 개척정신을 보여준다.
한진그룹을 세계적 종합물류 기업으로 이끈 고 조양호 선대회장의 평전(이임광 지음)이 그의 5주기를 맞아 이달 초 출간됐다. 그의 세계주의적 철학과 원칙을 담은 ‘함께해서 멀리 간 아름다운 코즈모폴리턴’, 인간적 면모를 그린 ‘따듯하게 조용하게’, 경영자로서 남다른 식견과 결단을 보여주는 ‘같은 세상도 다르게 본 혜안의 앵글경영’ 등 10개 장으로 구성됐다.
조 선대회장은 1974년 1차 석유파동이 한창이던 때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78년부터 2년간 지속된 2차 석유파동으로 항공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그는 선친과 함께 원가를 줄이면서 시설과 장비 가동률은 높이는 전략으로 위기를 헤쳐나갔다. 또 항공기 구매를 늘려 석유파동이 끝난 뒤 중동의 새로운 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글로벌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 결정도 그가 이룬 업적이다. 조 선대회장은 경쟁이 치열한 항공 시장에서 글로벌 항공사 간 협력을 돌파구로 삼았다. 2000년 미국 델타항공, 프랑스 에어프랑스, 멕시코 아에로멕시코와 손잡고 출범한 스카이팀은 현재 19개 회원사로 늘었다. 이들은 전 세계 170여개국에서 1062개 도시로 매일 1만편 이상 띄운다.
조 선대회장은 2009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1년 10개월간 50차례 해외 출장을 다녔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110명 중 100명을 만났다. 이때 비행기로 이동한 거리만 약 64만㎞로 지구 16바퀴에 달한다.
조 선대회장은 승객과 승무원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1997년 괌 추락 사고 이후 20년 동안 안전운항에 1조원 이상 투자했다. 지금까지 25년간 단 한 건의 인명 사고도 발생하지 않은 것은 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평전 추천사에서 “세계 항공 역사에 조 선대회장처럼 전문성과 지속가능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경영자는 없다”고 평가했다.
한명오 기자 myung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