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협치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

입력 2024-04-30 00:38

대한민국 국회의 대표인 국회의장은 당적 보유 및 상임위 활동이 금지된다. 정치적 중립과 의사 진행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취지다. 의장이 당적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 15대 국회 후반기 박준규 의장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의장직을 수행하는 선례를 처음 만들었다. 2002년엔 이만섭 의장이 주도해 국회법을 개정하면서 당적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의회정치의 원조인 영국도 의장은 당적을 가지지 않는다. 의장은 다음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것도 관례다. 박준규 의장이 16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관례가 됐다. 그만큼 정치적 편향성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제헌국회 이후 많은 시행착오 등을 거치며 개선되고 다듬어진 제도들이 한 달 뒤 열리는 22대 국회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4·10 총선에서 압도적 의석을 거머쥔 더불어민주당에선 국회의장이 기계적 중립을 지켜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국회의장은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견제하고 소수당과의 타협을 유도해야 하지만, 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들은 “여야 합의가 안 되면 다수당 주장대로 갈 수밖에 없다” “협의만 강조해선 안 된다” “기계적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한다.

원 구성 역시 4년 전 상황이 반복될 조짐이다. 예산결산특위를 포함해 18개 상임위원장 자리는 13대 국회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 제안으로 의석 비율로 나누는 게 정착됐다. 그런데 4년 전 21대 국회 개원과 함께 이런 관행이 깨졌다. 당시 거대 여당이던 민주당은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했다. 원내 1당이 국회의장을 맡으면 2당은 법사위원장을 가져가는 관례도 깨졌다. 체계·자구심사권을 가진 법사위원장은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장치로 그간 원내 2당이 맡아 왔다.

민주당에선 22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직을 다시 한번 싹쓸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의석이 168석을 넘으면 모든 상임위에서 과반 이상이 되니 그 당이 모든 상임위원장을 가져가도 된다는 논리에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을 모두 가지는 미국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명분도 보탰다. 의석 수에 따라 상임위원장을 나누는 관행은 다수당의 일방독주를 견제하려는 원칙이 반영된 것인데, 이 역시 무시될 상황에 처한 것이다.

민주당은 21대 마지막 회기인 5월 임시국회에서 총선 압승을 바탕으로 채상병특검법, 전세사기특별법에 이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로 되돌아온 이태원참사특별법 재표결도 관철시킨다는 입장이다. 민주유공자예우법, 가맹사업거래공정화법, 제2양곡관리법 개정안 처리도 공언한 상태다.

총선 민심을 확인한 만큼 이 법안들을 빨리 처리하자는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여당과의 합의는 없었다. 쌍특검법 역시 재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대로라면 22대 국회는 벽두부터 거대 정당의 입법 독주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반복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이어질 것이다.

승자독식 세계에서 양보와 타협은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현실정치는 그만큼 가혹하다. 그럼에도 상생과 협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4년 전 그랬던 것처럼 22대 국회에서도 거대 야당의 일방 독주가 이어진다면 민주당이 윤석열정부를 오만과 독선, 불통 정권이라고 비난했던 것과 다름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그동안의 일방주의, 불통, 독선 비판 속에 4·10 총선에서 민심의 호된 심판을 받았다. 물론 전제는 민의에 따라 정부와 여당이 먼저 대화의 손을 내밀어 야당과 상생, 협치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역시 국정 파트너이자 다수당으로서 협치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