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교회·고문당한 권서… 송산면 전체서 학살 만연

입력 2024-04-18 03:03
조지 글리슨 선교사가 1919년 존 모트 국제YMCA 사무총장에게 보낸 보고서에 실린 사진. 일경으로부터 고문당해 팔이 파랗게 변했다는 권서(왼쪽)와 주민들이 1919년 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의 불탄 경다리교회 앞에 서 있다. 오른쪽에 선교사의 모습도 보인다.

1919년 3월 경기도 수원에서 일제에 저항한 만세운동으로 학살이 벌어진 마을이 그동안 알려진 제암리뿐 아니라 이 일대 전역까지 포함됐다는 사료가 미국 선교사의 보고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됐다.

17일 방문한 경기도 화성 향남읍의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919년 3월과 4월의 한국 봉기’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전시돼 있었다. 미국 컬럼비아대에 보관돼 있던 조지 글리슨 선교사의 보고서로 일반에 공개된 건 처음이다. 보고서에 실린 4장의 사진은 글리슨 선교사가 존 모트 국제 YMCA 사무총장에게 보낸 것이다.

미 YMCA 총무였던 글리슨 선교사는 당시 만주에서 서울을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 화성시 송산면 일대의 학살 현장을 찾아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해 전 세계 언론으로 배포된 그의 사진은 일제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사진 뒷면에 필기체로 사진설명이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전시된 사진은 일제가 경다리(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일대를 휩쓸고 간 뒤에 풍경을 담아낸 것이다. 사진에는 ‘일제의 보복으로 민가가 불탔고 임시 움막을 지었다’는 사진설명대로 그을린 집과 새로 지은 작은 집들이 듬성듬성 자리한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으로는 정확히 파악이 안 되지만 “일경에 의해 고문당한 한국인 권서의 팔이 파랗게 변했다”는 설명도 있다. 권서(또는 권서인)는 당시 전도를 목적으로 성경이나 전도책자를 팔던 행상인을 말한다. 고문당한 권서와 선교사들이 함께 사진을 찍은 곳은 불탄 경다리교회 앞이다.

이혜영 기념관 학예사는 “105년 동안 제암리 학살을 중심으로 화성 일대 일제의 만행이 알려졌는데 글리슨 선교사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송산면 전체에서 학살이 만연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앞으로 이 일대 독립운동과 피해 역사를 발굴하는 단초가 됐다”고 말했다.

제암리교회 학살 105주기를 기념해 지난 15일 개관한 기념관은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의 보고와도 같은 공간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벌어진 현장 앞에 총면적 5414㎡(약 1640평), 지하 1층·지상 1층 규모로 건립됐다. 전시실에는 선교사들이 남긴 사진과 보고서,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재판 기록, 개항기부터 광복까지 이어진 화성 독립운동 역사가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화성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혹함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다는 데 의의가 크다.

당시 화성 주민들은 송산면사무소 일대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시위를 강경 진압한 노구치 고조 일본 순사부장을 살해했다. 일제는 주모자 검거와 수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통상 절차를 생략한 채 송산면 일대 15개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제암리교회 학살도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부대가 16세 이상 남자 21명을 교회에 모아놓고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한 뒤 일제 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던 만행이었다.

화성=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