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가 유명한 유대 랍비를 찾아가 물었다. “랍비여, 어떻게 하면 제가 모세 같은 지도자가 될 수가 있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자네는 왜 자기 자신이 되려 하지 않고 또 다른 모세가 되려고 하는가. 우리는 두 사람의 모세를 필요로 하지 않네.”
명산유곡은 하늘을 찌르는 산세와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과 그 주변을 감싸는 신비로운 경치를 갖고 있으나 그 각각은 저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독특한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신다. 79억 인구가 지구상에 있으나 창조주는 이 중 단 한 사람도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 유일한 삶은 다른 누구와도 같을 수 없고, 그렇기에 다른 어떤 사람도 복사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 이는 모든 삶의 내용에 적용된다.
미국 감리교의 유명한 설교학자 프레드릭 뷔크너 목사는 “설교자는 강대상에 올라올 때 자신의 삶을 과일 넝쿨처럼 달고 올라온다. 그 삶은 그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것”이라며 “이 설교자는 그 삶에서 자기가 만난 고유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설교를 굳이 흉내내거나 모방할 필요가 없다. 모든 설교는 다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고유의 삶을 빚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자신을 맞추거나 그 삶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려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나타나고, 자기 본모습과는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른 사람의 설교를 흉내내고 다른 이의 춤을 모방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과 사상, 설교, 하나님과 만난 경험, 자신만의 사명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많은 사람 중의 또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
물론 다른 사람의 삶에서 자극을 받을 수는 있다. 또 다른 사람의 길에서 배우고 익히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잠시 모방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것을 만들어가는 재료요 원료요 과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감당하지 못할 기준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목격하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 비교에서 오는 우월 혹은 열등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며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며 다른 사람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성공해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삶의 단면일 뿐이다. 만일 평범한 시민일지라도 자기만의 삶을 빚어간다는 자부심과 목적의식이 있다면 그는 그 시대의 대통령보다도 가치가 떨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힘겨운 노동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듯한 사람도 그 안에 ‘자기만의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승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길 소원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닮음’은 복사도 아니요, 그런 척하는 가면 쓰기도 아니다. 주님의 삶은 우리에게 인생을 살아갈 큰 윤곽과 원칙 그리고 삶의 큰 방향성을 스케치해 놓으신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고유한 몸부림으로 그려진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 말씀하셨다.
모세는 모세의 길이 있으며, 베드로는 베드로의 사명이 있다. 바울에게는 바울만이 가진 독특한 사명이 있었듯 우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한 방향 속에서 각자가 가진 자기만의 걸음이 있다. 우리에겐 자신만이 출 수 있는 고유한 춤이 있다. 인류 역사상 다른 누구도 가지 않았던 자기만의 유일하고 독특한 길을 걸어가며 십자가로 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우리는 저마다 고유하고 독특하며 소중한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이 나만의 고유한 삶을 빚어가심을 믿으며 자신의 춤사위를 만들어가는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새문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