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여진에 서민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온 빌라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 수천만원에 달하는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에 빌라에 전세로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크게 줄고 있는 것이다. 줄어든 수요는 전세사기로부터 안전한 아파트에 전세로 거주하거나 보증금을 줄여 빌라에 월세로 거주하겠다는 선택으로 옮겨가고 있다. 수요가 쪼그라들자 건설사들도 빌라 짓는 일을 멈췄다. ‘신속 인허가’로 대표되는 규제 완화 정책의 효과도 아파트에만 집중되고 있다. 이에 빌라를 중심으로 공급하던 중소·전문건설사가 연쇄 도산하는 등 업계에도 타격이 가해지고 있다.
비아파트 인허가 ‘뚝’
8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2월 비아파트 인허가는 2439가구로 지난해보다 44.9% 줄었다. 실제 공사에 들어간 가구는 2233가구로 1년 새 36.0% 줄었다. 입주 가구 또한 3775가구로 반 토막 났다. 비아파트 통계는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를 제외한 다세대·다가구·연립·단독 주택을 모두 포함하는데 대부분은 빌라다. 이 같은 비아파트 인허가·입주·착공 감소는 빌라의 공급이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파트와 비아파트 모두 공급이 부진해지자 정부는 지난해 9월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주택 건설 장애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인허가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한다는 내용도 방안에 담겼다. 그러나 이 같은 인허가 규제 완화 효과도 아파트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아파트 인허가는 지난해 8월 1998가구로 저점을 기록한 후 12월 9만1202가구까지 증가했다. 지난 2월에도 2만473가구로 양호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비아파트 시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규제 완화 이후 지난해 11월 비아파트 인허가는 4186가구로 증가했으나 이후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지난 2월 인허가 가구는 지난 10년 평균에 비하면 74.7% 감소했다.
이 같은 부진은 비아파트가 외면받으면서 건설사들이 빌라 신축을 꺼리는 현실을 보여준다. 전세사기 공포가 가시지 않은 데다 고금리 여파까지 더해진 영향이다. 전세보증금을 대출할 경우 부담해야 하는 이자가 늘었는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안고 가느니 빌라 전세 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세입자들 월세만 찾는다
세입자들은 빌라 전세 대신 월세를 선택하는 추세다. 매달 내는 월세는 부담이지만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작으므로 안전하다는 판단이다. 지난 2월 전국 비아파트 전·월세 거래 중 월세 비중은 70.7%로 5년 평균(51.8%)을 웃돌았다. 특히 지방은 이 같은 빌라의 월세 선호 현상이 두드러졌다. 지방의 2월 비아파트 전·월세 거래 중 77.5%가 월세였다.
수요가 몰리면서 빌라 월세 거래 건수는 치솟고 있다. 부동산 정보 제공업체 경제만랩에 따르면 지난 1월 월세가 100만원 이상인 빌라 계약은 923건으로 지난해보다 15.1% 늘었다.
또 다른 주거 사다리인 오피스텔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1~2월 전국 오피스텔 전·월세 거래 4만4201건 중 2만8562건은 월세였다. 전·월세 거래 중 67.4%가 월세인 셈이다. 이는 2011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서진형 광운대학교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빌라, 오피스텔 등 비아파트의 월세화로 주거 취약계층의 주거비용이 자꾸 커지고 있다”며 “국민의 뇌리에서 전세사기 사건이 사라지기까지 2~3년은 비아파트 전세 기피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제 혜택 효과 미지수
비아파트 기피 현상의 여파는 건설업계에도 미치고 있다. 비아파트를 중심으로 공급하던 중소·중견 건설사와 전문건설사의 부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년간 21개의 전문건설사가 부도를 신고했다. 지난달까지 올해 부도를 신고한 전문건설사는 9곳이다. 3개월 만에 지난해 부도 건설사의 절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정부는 지난 ‘1·10 부동산 대책’에서 발표한 세제 혜택이 빌라 공급의 마중물 효과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국토부는 올해 1월~내년 12월 준공되는 60㎡ 이하이면서 취득가액이 수도권 6억원·비수도권 3억원 이하인 다가구·공동주택과 도시형 생활주택에 대한 원시취득세를 최대 50% 감면하겠다고 밝혔다. 이 기간에 공급된 신축 비아파트도 취득세·양도세·종합부동산세 산정 시 주택 수에서 제외된다. 세금 부담을 덜어 비아파트 수요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비아파트 공급이 늘어나고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다.
다만 이 같은 세제 혜택이 빌라 수요 증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빌라의 경우 매매보다 전세 수요가 시장 흐름에 영향을 준다. 빌라는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등 청년층이 전세로 거주하며 목돈을 모아 아파트로 ‘상향이동’하는 사다리 역할을 하므로 대부분 수요가 임차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세제 혜택은 빌라 매매 시에 주어지는 것이어서 시장 분위기 반전에는 충분치 않다는 평가다. 국토부 관계자는 “추가적인 수요 진작책은 준비하고 있지 않다”며 “3~4월 대책의 효과가 본격화되는 만큼 일단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세종=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