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나라는 거대한 신상처럼 닥쳐오지만, 하나님 나라는 조그만 씨앗처럼 다가온다. 세상 나라는 타인의 땅을 부수면서 들어오지만, 하나님 나라는 타인의 땅을 일구면서 스며든다. 다니엘서를 보면 세상 나라는 금, 은, 동, 철, 도기와 같다. 모두 딱딱하기 이를 데 없어 부딪히기만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금에서 곡식이 자랄 수 있을까. 은에서 나무가 클 수 있을까. 청동에서 꽃이 필 수 있을까. 도기에서 과일이 영글어 갈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없다. 우상의 나라에 생명의 자리는 없다. 쟁투하다 차례로 무너지기 일쑤다. 폴 케네디의 고전 ‘강대국의 흥망’은 이를 생생히 증언한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흙에서 왔다 흙으로 간다는 진실의 대열에서 이탈하기 마련. 그토록 되고 싶던 금, 은, 동, 철, 도기란 것이 정작 씨앗 하나 심을 수 없는 허망한 우상임도 이내 망각한다. 생명을 품을 도리 없는 우상 나라는 대중을 잠시 조종하고 억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면을 한결같이 새롭게 하진 못한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앗을 가지고 마음을 파고든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일들이 흙 속 깊이 은밀히 진행된다.
하나님 나라와 우상 나라는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 그러니 일부 그리스도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금(송아지)의 나라를 힘으로 꺾는 다이아몬드의 나라가 아니다. 씨 뿌리는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는 흙의 나라다.
세상에서 잘나가는 번영(prosperity)의 자리 말고, 세상을 잘되게 하는 번성(flourishing)의 자리다. 흙은 화려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 보잘것없다. 함부로 밟히기 십상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무시당해도 표정 굳어지는 일 없이 늘 부드럽게 수용하는 자세다. 그래서일까. 하나님만큼은 흙을 아껴주신다. 은금의 나라는 지나가게 하셔도 흙의 나라는 끝이 없게 하신다. 이미 부서져 있으니 더 부서질 것도 없는 흙을 성경은 그래서 좋은 땅이라 한다.
어쩌면 인간의 일생에도 사계를 닮은 네 가지 땅(길가, 바위, 가시 떨기, 옥토)이 있지 싶다. 대부분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미숙한 베드로처럼)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땅(지역구?)으로만 다니며 자기 뜻을 완고하게 관철하려 한다. 그렇지 않고 금(의 나라) 배지가 아무리 절실해도 (성숙한 베드로처럼) “자기 팔을 벌려” 상대 장점도 칭찬하고 정책도 좋으면 수용할 줄도 아는 좋은 흙으로 다져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오늘은 상대가 다소 자갈밭 같아 보여도 섣불리 그의 인생 사계를 송두리째 판정하진 말자. 예단하지도 말자. 지금은 저래 보여도 언젠간 하나님이 고운 흙으로 바꾸실지 어찌 알겠는가. 이번 판에선 괜찮은 땅 같다고 칭찬 일색이었어도 장담하진 말자. 다음 판에선 생각도 못한 정쟁에 휘말려 잡초군락 신세가 될지 어찌 알랴.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지 않았던가. 남에게 전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도리어 두려워한다고 바울마저 토로했었다.
설령 그럴듯해 보이는 흙이라 해도 농부가 씨앗을 뿌려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적막한 빈 들이 될 뿐. 위에서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퍽퍽한 모래가 되고 만다. 잊지 말자. 하늘이 써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땅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다만 햇살 비추시고 비 내리시고 시원한 바람 불게 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정책의 씨앗을 위해 땀 흘릴 옥토로 ‘남아 있는’ 의로운 후보들이 유세 현장 어디선가 숨어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해 본다. 지나친 바람일까.
송용원(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