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축제와 일상: 삼짇날과 오디세이아

입력 2024-04-05 04:02

잔치니 축제니 하는 것은
일상의 고된 노동의 무게를
아는 이들에게만 절실한 것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삼짇날을 즐겨왔다. 본격적인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점이니 그만한 잔치와 놀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꼭 삼짇날만 그럴까. 절기마다 있는 명절은 쉼 없는 노동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때마다 필요한 휴식과 충전을 잊지 않고 챙기려던 조상들의 혜안이었다.

옛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명절’은 즐거이 기다려지던 시간이었다. 수많은 신을 섬기던 사람들답게 이들의 명절은 신들에게 바치는 제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의 ‘祝.祭(축제)’였다. 예로 매년 아테네 전체를 들썩이게 했던 ‘대(大)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시민들은 제의를 바친 다음 비극경연을 관람하고 술과 음식과 놀이로 흥성이었다.

축제와 잔치는 일상의 활력소일 뿐만 아니라 고전문학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일리아스’에서도 사람들은 틈틈이 신들에게 제의를 바치며 잔치를 열고 ‘오디세이아’는 아예 잔치들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귀향길에 환상세계에 들어선 오디세우스는 온갖 신기한 잔치를 경험한다. 노동을 일상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난 환상세계의 종족들은 축제와 잔치를 일상으로 삼는다. 그런 세상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온갖 도피처의 모습을 하고 오디세우스를 유혹한다. 의무의 망각, 고생 없는 삶, 영원한 잔치. 여신 칼립소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안할 때 그 유혹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련의 경험을 통해 배워온 그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며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한계도 분명하고 고생도 많은 인간세계지만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인간다움을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곳도 그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사리 돌아온 고향에서 오디세우스는 자기 아내에게 구혼해 온 108명의 무리에게 화살을 퍼부으며 그들을 죽인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새해를 맞이하는 아폴론의 축제일이었다. 너무 무자비한 살육인 걸까. 하지만 시인 호메로스는 구혼자들의 존재 자체가 죽음으로 씻어야 할 범죄라는 것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준다. 구혼자들은 다른 어떠한 인간들과도 질적으로 다른 조건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마치 환상세계의 종족이라도 된 듯 잔치를 일상으로 삼는다. 환상세계의 종족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누리는 풍요는 타인들에 대한 억압과 강제의 결과라는 점이다.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며 잔치에 탐닉하는 그들은 모든 의무를 남들에게 전가하고 혹독한 노동을 강요한다. 이렇게 약탈적으로 얻어낸 풍요를 일상으로 누리는 그들은 결핍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 삶을 이끌어줄 어떠한 원칙도 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이 누리는 수월한 삶,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향락, 이 모든 것은 사실 올림포스 신들의 전형적인 존재 방식이며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낯선 삶의 방식이다. 이 금지된 욕망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알아본 이가 오디세우스였으니 그들은 아폴론의 축제일에 살육돼 기괴한 제물로 바쳐지게 된다. 구혼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디세우스가 부정하는 모든 것이다. 구혼자들은 마치 신과 같이 자기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한편으로 오디세우스가 영생의 제안 앞에서 인간 조건을 영웅적으로 수락하는 것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삶이 너무 수월해 파멸하는 구혼자들을 본다. 다시 말하지만 잔치니 축제니 명절이니 하는 것은 일상의 고된 노동의 무게를 아는 이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아무쪼록 이런 분들께는 이번 삼짇날이, 마침 총선과 얼추 맞아떨어지기도 하니, 달콤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허나 구혼자들처럼 일상이 잔치인 자들, 무한한 욕망과 탐닉 속에 살아가는 자들은 화전이 차려진 술상 대신 조상님들 대신 제우스와 아폴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터. 그대들에게 파멸이 임박했으니.

이준석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