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봄날의 일

입력 2024-04-05 04:05

유독 봄꽃들이 다투어 화려함을 뽐내는 이맘때, 시간 가는 게 마냥 아깝다. 꿈같은 봄날이다. 나는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내 무릎에 받치고, 몇 줄의 문장을 써 내려간다. 제목은 ‘봄날의 심심한 기쁨’ 정도가 좋겠다. 맞은편 버드나무 가지가 휘늘어져 허공을 빗질한다. 며칠 전, 친구가 열두 달 중에 어느 달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사월의 나무 이파리가 제일이라 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사월은 어떤 그림으로 남는가.

머윗잎을 손질하다가 까맣게 물든 손톱 밑. 입안에 꽉 차는 머윗잎쌈의 쌉싸래한 향. 밤 벚꽃이 활짝 피어, 함박눈이라도 온 듯 밖이 환하게 느껴지는 나날들. 국숫집 할머니가 두유 병을 씻어 꽂아둔 개나리 두 줄기. 백일 지난 아랫집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것. 보드라운 고양이의 배에 대고 뺨을 비비는 아침. 단골 상회에 전화를 걸어 강릉 왕산골 두릅을 수확했는지 물어보는 시간.

박경리 토지문화관 앞, 물결이 잔잔하게 반짝이던 논물. 와글와글 봄밤의 적막을 깨우던 개구리 울음소리. 막국숫집 처마 아래 제비집과 마름모꼴로 입을 쫙 벌리며 어미를 기다리던 제비 새끼들. 빵이 나오는 시간, 갓 구운 황금색 식빵이 나란히 진열된 것을 본 일. 주먹보다 굵은 알뿌리 위에 붓을 꽂은 듯 튤립 싹이 올라온 것. 청둥오리가 주황색 발을 곧게 뻗어 날아가다가,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며 수면 위로 착지하던 모습. 박용래의 산문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를 아껴 읽으며, 땅콩 캐러멜을 천천히 녹여 먹는 밤.

비 소식에 저 꽃들이 쉬이 저버릴세라 안타깝다. 차가 지나가면 갓길에 모여 있던 벚꽃이 풀썩 일어났다 가라앉는다. 지천이 꽃대궐인데, 나는 와병 중이라 꽃놀이를 갈 수 없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에게 전화를 넣으려다, 밤 목련 사진을 찍어 보낸다. 같이 꽃 보러 가자고. 당신의 회복을 기도한다고.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