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국회의원 선거는 ‘기후 유권자’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선거다. 기후 유권자는 기후 이슈에 민감하고 기후 의제를 중심으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유권자를 말한다. 올해 1월 기후 유권자가 10명 중 3명이라는 대규모 설문조사 결과가 나오며 여야는 4·10 총선 주요 공약에 모두 ‘기후 위기 대응’ 분야를 포함했다. 특히 기후 정책에 소극적이었던 국민의힘이 더불어민주당보다 먼저 두 차례에 걸쳐 기후 공약을 발표해 기후 위기가 정치 이념을 뛰어넘은 사회적 의제임을 보여줬다.
다만 이번 총선이 ‘기후 선거’가 되기에는 정당별 공약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 평가다. 개별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권에서 기후 유권자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목소리를 실제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후산업’ vs ‘RE100’…같은 듯 다른 공약
5일 여야의 기후 공약을 살펴보면 양당 모두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기후 관련 기술·산업 육성에, 민주당은 재생에너지의 빠른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국민의힘은 원자력 발전과 신재생에너지의 균형적 활용을 약속하며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전(SMR) 기술 개발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원전·풍력 등 무탄소 전원에 유리하게 전력시장도 개편할 방침이다.
재생에너지 중 해상풍력 활성화를 위해 계획입지 및 인허가를 간소화, 주민피해 보상 등 기준도 마련한다. 수소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그린수소 투자를 확대하고, 충남·인천 등 석탄화력발전소 지역을 청정수소 생산지로 전환하겠다는 구상도 담았다.
민주당은 기업의 ‘RE100’(재생에너지 100% 활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신재생에너지 의무 공급비율(RPS)을 상향하고, 한국형 발전차액지원제도(FIT)도 재도입한다. RPS는 발전사들이 일정 비율 이상을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다. FIT는 소규모 태양광발전 사업자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20년 동안 고정가격 계약을 맺는 제도로 지난해 7월 폐지됐다.
아울러 민주당은 RE100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RE100 펀드와 RE100용 발전사업 융자 우선 사업 등 기후금융 활성화를 추진한다. 재생에너지 사업 수익을 지역 주민들에게 연금이나 난방비로 지급하는 정책도 내세웠다.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송배전 설비 조기 건설 등도 추진한다.
여야가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공약도 눈에 띄었다. 국민의힘은 기후대응기금을 2027년까지 5조원으로 늘리겠다고 밝혔고, 민주당은 같은 기간에 7조원까지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규모가 다를 뿐 기금 확충 방침은 같다.
제21대 국회의 기후위기대응특별위원회를 22대 국회에선 상설위원회로 만들겠다는 공약도 양당에 모두 담겼다. 민주당은 여기에 더해 기후위기 대응 전담 조직인 기후에너지부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이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에 대해서도 양당은 유상할당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관심 끌었지만…결국 ‘이행’이 관건
소수 정당 중 가장 구체적인 기후 공약을 내놓은 곳은 녹색정의당이다. 녹색정의당은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100% 전환한다는 목표 아래 ‘1만원 기후 교통패스’ ‘2030년까지 모든 석탄화력발전소 퇴출’ ‘노후 원전 폐쇄, 신규 원전 건설 중단’ ‘태양광 패널 설치 지원’ 등을 발표했다.
이외에 개혁신당은 무탄소 에너지(CF100)와 RE100 기반 구축, 새로운미래는 기후 신산업 연구개발 지원, 조국혁신당은 태양광·풍력발전 프로젝트 관련 특별법 제정 등을 약속했다.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여러 정당이 기후 공약을 발표한 데에는 의미가 있으나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재원 확보나 법·제도 개선 등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봤다.
기후위기 대응 비영리법인인 기후솔루션 측은 “재생에너지는 송전망이 아니라 대부분 배전망에 연결되는 소규모 분산형 자원이기 때문에 계통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가상발전소(VPP) 등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며 “해상풍력도 사업 추진 단계에서 오랜 시간이 소요돼 국가가 주도해 공급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테크산업 육성에 대해서도 “화력발전 중심의 인센티브 구조로 인해 현재 전력시장 제도 내에서 비즈니스 모델 발굴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짚었다.
정당 차원에선 기후 공약을 핵심 의제로 포함했지만 지역구 후보자들은 기후 공약을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기후 유권자 설문 기획에 참여한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장은 “지역구 후보들의 기후 공약을 추가로 전수조사한 결과 양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개발 공약에 비해 기후 공약은 미미한 수준이었다”며 “유권자는 기후 의제를 다룰 준비가 되었는데, 정당이나 후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이어 “정치권에서 기후 공약을 내놓으면 어떤 정책이 더 효과 있는지 토론과 공론화가 돼야 하는데 이번 선거는 ‘기후 공약을 냈다’는 단계까지만 왔다”며 “2년 뒤 지방선거에서는 더 실질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도록 기후 유권자가 정책을 요구·개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을 만들어 기후 행동을 유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세종=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