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해 보이려고 하는 유혹은 대단하다. 세상은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증명해보라고 다그치는 소리로 가득하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마법에 걸리는 순간 삶은 피곤해진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욕망은 강하고 오래된 것이다. 세상은 그런 마법에 걸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심리전은 치열하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나 괜찮은 사람이야’를 증명해 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 자기 증명을 하다 보면 과욕이 생긴다. 자신의 실제와 다른 모습이 부각될까 봐 불안해한다. 과대포장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얼굴에 핏발이 서 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삶은 빨리 지친다.
실력을 입증하려면 실력을 쌓아야 한다. 저마다 공들여 쌓은 스펙이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지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는 힘들다. 신기한 것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보다 나은 사람은 끝없이 출몰한다는 점이다. 잘난 사람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 경쟁자는 끊임없이 나타난다. 한번 경쟁시장에 내몰리면 모두 희생자가 된다. 쫓고 쫓기는 삶은 무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실력보다 외적 포장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삶은 갈수록 부실해진다. 경쟁사회는 허영과 허세가 늘어난다. 자신에 대한 과장과 경쟁자를 축소하는 일에 능해야 한다. 나를 알아달라고 소리를 치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냉정한 심판관이 즐비하다.
세상의 장단에 추던 춤을 멈춰야 한다. 약간은 둔감해져야 한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때로는 귀를 막을 줄 알아야 한다. 항상 사람들의 평가와 여론은 춤을 춘다. 너무 예민해지지 않고 적당히 무시하는 것도 실력이다. 전쟁을 치를 때 유능한 지휘관은 둔감력이 탁월하다고 한다. 지휘관이 너무 예민하면 작은 소리에도 대포를 쏘아야 한다. 전력 낭비다. 세상의 강요에 휘둘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들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존재의 넉넉함을 확보해야 한다. 자기만의 노래를 배워야 한다. 누구나 내가 부를 노래가 따로 있다. 모창대회 하듯 남의 흉내만 낸다면 아무리 잘 불러도 아류가 된다. 자기에게 맞는 음역과 리듬이 있다. 인간은 복제가 안 된다. 따라 할 이유가 없다.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의 부추김과 강요에 떠밀리지 않는 내공을 쌓아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삶은 자기를 증명하라는 사탄의 거짓된 속삭임으로부터 승리한 이후 시작됐다.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대신 자기를 증명해 내려고 안달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허세에 대해 책망하셨다. 존재의 당당함은 뿌리에서 나온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싸움이다. 겉으로 드러난 무성한 잎사귀만 보고 속지 않아야 한다. 뿌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조용히 존재할 뿐이다. 뿌리는 초조해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나무의 열매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
나를 알아 달라고 소리칠 필요가 없다. 저절로 존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온다. 뿌리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면 그 순간 나무는 죽는다. 때이른 출현보다 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드러남은 조기에 막을 내린다. 시간의 싸움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기다릴 줄 아는 힘을 가졌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자신을 지켜내는 내구력이 있다.
지금도 “너를 증명해 봐!” 소리치는 강요에 내몰린 인생들은 무척이나 괴롭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만들려고 쫓기는 일상을 살아갈 때 삶은 피폐해진다. 진실은 멀어지고 허구로 가득하게 된다. 서로 견제하고 질시하고 무시하고 때로는 부러워하는 감정의 희비 곡선을 그리며 괴로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유를 획득하는 일은 중요하다. 너를 증명하라는 소음으로부터 빠져나오려면 귀를 막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산 수영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