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오식 (5) 문화적 오해로 성희롱까지 겪어… 6억 달러 공사 수주

입력 2024-04-05 03:08
권오식 보국에너텍 부회장은 현대건설에 재직하며 첫 해외 근무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배정받았다. 사진은 현대건설이 건설한 수도 리야드에 있는 내무성 본청 전경.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는 네옴시티라는 1200조원의 상상하기 어려운 초대형 미래 신도시 건설을 추진 중이며 완전히 개방됐다. 그러나 내가 첫발을 디딘 1984년 사우디는 여자가 운전할 수 없었고 모든 부분에서 폐쇄적이었다. 리야드 공항에 내려 입국 절차를 밟는 데도 자국민과 서양인 이외의 외국인에게는 무척 불친절했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서 지친 상태에서 ‘짐짝’ 취급을 받으며 중동 고유 복장인 ‘디슈다샤’를 입은 아랍 사람들 사이에서 몇 시간 동안 줄을 서 있자니 진이 빠졌다. 산업 역군이고 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렵사리 시작된 사우디 생활은 1, 2층이 사무실이고 3층이 숙소인 건물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 일하는,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생활보다 어려웠던 건 여러 번 당한 성희롱이었다. 20대 후반의 내 모습은 일부 중동 사람들에게는 여성적 분위기를 느끼게 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발주처인 사우디 국방성 로비 안내 데스크 당직 군무원이 악수를 하는데 두 번째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 나는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나도 똑같이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나를 붙잡고 건물 밖으로 못 나가게 했다. 까닥하면 그곳을 못 빠져나올 뻔했다. 사무실에 가서 현지인에게 물어보고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악수하며 손바닥을 간질이는 것은 동성애자들이 같이 잠을 자자고 제의하는 제스처라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같이 웃으며 손바닥을 문질렀다니….

또 다른 사건은 사우디에 있는 발주처인 미국 공병단(COE)을 들락거렸을 때 일어났다. 자주 찾아가던 인사 중 50대 중반의 미국인이 술과 돼지고기가 숙소에 있다며 저녁 초대를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발주처 인사와 친해질 기회이며, 더불어 사우디에서 구하기 어려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그날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 그가 내 옆에 앉아 디저트를 먹으며 앨범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 허벅지를 만지는 것이었다. 친밀함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그의 손이 허벅지를 넘어 사타구니 쪽으로 올라왔다. 아무리 발주처 인사이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지만 2년 근무하는 동안 해외 공사 영업에 대해 많은 걸 배우는 보람도 상당했다. 당시 현대건설을 비롯한 한국 건설 업체의 가장 큰 시장은 사우디였다. 그곳에서 공사를 발주하고 계약하며 모든 절차가 표준이 되는 등 중동 지역 건설 영업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내가 담당한 발주처로부터 리야드 지사에 6억 달러(약 8100억원) 수주 실적이 쌓인 것은 큰 보람이었다. 사원으로서 첫 해외 근무지에서 쌓은 실적으로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문화적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과중한 업무로 힘들었지만 공사를 수주할 기회가 많은 지역에서 첫 해외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