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 제대를 앞두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 입사 시험은 현대 삼성 대우가 같은 날 치렀기 때문에 그룹 3곳 중 하나만 응시할 수 있었다. 나는 현대그룹을 선택했다. 학벌을 가리지 않고 지방색이 없기에 본인만 잘하면 기회가 무한한 ‘기회의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또 현대는 다른 그룹과 다르게 모든 계열사를 직접 설립해 자체적으로 키워 온 것도 마음에 들었다.
입사 시험에 합격해 최종 면접을 보는데 면접위원장이 현대종합상사를 1지망으로 지원한 이유를 물었다. “빨리 해외지사에 나가 돈을 벌고 싶다”는 진심을 말했다. 그러나 면접위원장은 “자네가 잘 못 알고 있다”며 현대건설에 가야 해외에 더 빨리 나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현대건설로 배정받아도 괜찮냐”는 질문에 “해외만 빨리 나갈 수 있으면 현대건설도 좋다”고 답했다. 그 말이 나를 현대건설에서 32년 8개월 동안 직장생활을 하게 했다. 이렇게 나는 상사맨이 아닌 현대건설의 해외영업맨이 됐다. 현대건설 해외영업본부에서 해외지사 근무 15년을 거쳐 해외영업본부장을 지내며 기록할 만한 많은 실적도 냈다.
현대건설에서 내 첫 해외근무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의 지사였다. 입사 2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그곳은 해외지사 중에서 소위 해외 영업의 육군사관학교라고 불렸다. 신규 공사 건도 가장 많았고 건당 공사 금액도 수천억원에 달해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부임지였다.
현지 여름 기후가 섭씨 50도를 넘나들어 목욕탕보다 덥고 이슬람교 종주국인 만큼 문화적 제약이 엄청나 많은 이들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평가했다. ‘일 많고 환경이 안 좋은데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때마다 ‘많이 배우고 돈도 많이 벌면 된다’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사우디로 떠나던 1984년 4월, 나는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탔다. 김포 국제공항까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배웅을 나오셨다. 아들이 이역만리로 돈 벌러 가는 것이 딱해 보였는지 어머니는 내 등을 연신 어루만지시며 “무더위에 건강해라” “밥 잘 먹어라”는 당부를 끊임없이 하셨다. 어머니를 포옹하고 돌아서는데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바레인까지 가는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이후 중동 항공사로 갈아타고 리야드로 가는 여정이었다. 비행기 안에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으니 공항에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제야 나도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과 생애 첫 이별이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무언가를 해 드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게다가 중동의 대표적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년간 공사 수주 영업 직원으로 일하게 됐으니 중년이 돼 ‘중동의 산업 역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중동에 대한 어떤 대화에도 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모를 뿌듯함도 밀려왔다. 그렇게 시작된 중동 생활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기후와 문화적인 차이를 이겨내는 것이었다.
정리=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