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심하게 혼난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 즉 십자가의 고난 죽음 부활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해서입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사람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일이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불안한 삶보다 안락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돈 명예 권력이 안락함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생기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속물’입니다. 속물이란 말은 1820년 영국에서 처음 사용됐는데 한 학교에 평민 출신 학생과 귀족 출신 학생을 구별하기 위해 평민 출신 학생 이름 앞에 ‘작위가 없다’는 뜻의 ‘Sine nobilitate(Without nobility)’를 붙였고 이것이 지금의 ‘Snobbery(속물, 우월의식)’로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물의 원래 뜻은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지금은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속물은 인간의 가치를 사회적 지위로 규정합니다. 사람들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이러한 속물이 나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기본 욕구입니다. 그런데 욕구가 탐욕이 될 때 문제가 됩니다. 욕구는 필요한 것을 채우는 것이고 탐욕은 필요한 것을 채웠음에도 더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탐욕의 속물이 되는가.’ 이에 대해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사회적 지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통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인정받지 못할까 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로마의 속국 유대 땅을 억압에서 해방해 줄 구원자를 기다릴 때 예수님은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그분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기적을 베풀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돼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 예수님은 영웅이었습니다. 또 자신도 영웅이 되고 싶었고 장차 높은 지위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 예수님이 어느 날 십자가의 수난 죽음 부활을 언급하셨고 그는 펄쩍 뛰며 반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며 사회적 지위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될까 불안해 예수님의 수난을 말린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근원적인 분리의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분리에서 일치하려는 욕구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고착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충분히 모유를 먹지 못하고 엄지손가락을 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유와 엄지손가락은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엄지손가락은 모유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체물에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일치, 즉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복음 사역의 시작인 세례를 통해 하나님과 일치를 경험합니다. 사람들에겐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받는 무조건적인 사랑, 이를 믿는 것이 복음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십자가는 자기 비움이 아니라 자기 채움(인정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성북나눔교회(한덕훈 사제)
◇한덕훈 사제는 ‘가난한 나눔의 공동체’인 성공회 성북나눔의집 원장으로 지역 활동가와 ‘가난해도 행복한 세상’을 지향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