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 재범자에 무죄 선고
적법절차원칙 안 지킨 탓이나
판사도 합당한지 회의감 표현
인권 보장 차원인데 악용 빈번
미국식 사법방해죄 보완 없인
의미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어
적법절차원칙 안 지킨 탓이나
판사도 합당한지 회의감 표현
인권 보장 차원인데 악용 빈번
미국식 사법방해죄 보완 없인
의미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어
과거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내고 또다시 음주운전을 하다 붙잡힌 50대 A씨가 최근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A씨는 어느 새벽 한 맥줏집에서 소주 1병과 맥주 500㏄를 마신 뒤 자신의 차량을 운전해 귀가하던 중 목격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음주측정 요구에 불응했고 결국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그러나 A씨 측 변호인은 법정에서 이에 대해 ‘위법한 체포’라고 주장했고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경찰관들이 신고자 일행에게서 A씨 신병을 인계받으면서 피고인에게 음주운전 혐의로 체포한다고 고지하거나 현행범 인수서 등을 작성하지 않아 위법한 체포라는 것이다. 판결을 선고한 판사는 법정에서 ‘적법절차원칙’이라는 것은 문명의 시대에서 요구되는 것인데 피고인이 살고 있는 ‘야만의 시대’에서 적법한 절차를 지키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며 회의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토록 음주운전을 하고 도망하거나 측정을 거부했는데 무죄가 선고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얼마 전에는 음주운전 의심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가 접근하자 급히 우회전해 차량에서 내린 뒤 경찰이 요구하는 음주측정을 거부하며 도주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운전자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진 일도 있었다. 당시 경찰이 운전자의 옷 또는 팔을 잡고 음주감지기를 갖다 대며 불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현행범 체포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위법한 체포라는 것이다. 심지어 음주측정을 거부하면서 경찰관을 폭행한 사안에서 운전자를 체포하지 않고 음주측정을 요구한 경찰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음주단속 현장에서는 도주하거나 음주 사실을 감추면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잘못된 대응법’이 운전자들 사이에서 회자된다고 한다.
비단 음주운전 사건만이 아니다. 조직적인 증거인멸이 이뤄진 화이트칼라 범죄에서도 적법절차원칙으로 인해 무죄가 선고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3년 전 대법원에서 재판이 끝난 삼성 노조와해 공작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2심과 대법원은 검찰이 압수한 하드디스크에서 발견된 삼성의 부당 노동행위 관련 문건들이 위법수집 증거에 해당한다며 노조와해 공작에 가담한 것으로 기소된 이상훈 전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하드디스크 문건은 사내 메신저를 통해 검찰의 압수수색 사실을 전달받은 삼성전자 인사팀 직원이 지하주차장에 있던 자신의 차량 트렁크에 숨겼다가 발각된 증거였는데, 1심 재판부는 삼성전자 본사를 압수수색하도록 한 영장의 효력이 자료를 은닉한 장소에까지 미친다며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압수수색이 영장의 장소적 효력 범위를 넘어서서 집행됐으므로 위법수집 증거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최근 무죄 판결이 내려진 삼성바이오로직스 증거인멸 사건도 위법수집 증거라는 이유로 핵심 증거의 증거능력이 배척된 경우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김태한 전 대표는 2018년 5월 금융감독원이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해 ‘회계사기 혐의가 인정된다’며 행정제재를 예고하자 검찰 수사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가 보유한 관련 자료를 삭제할 것을 임직원에게 교사한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법원은 회사 측이 공장과 회의실 바닥에 은닉한 서버와 외장하드, 업무용 PC에서 입수한 디지털 증거가 위법 수집이라는 이유로 이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검찰이 압수한 이들 디지털 증거 가운데 혐의사실과 관련한 것만 선별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압수한 일부 증거는 영장에 기재된 혐의사실과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에서는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가 원래 저지른 범죄보다 더 무거운 사법방해죄로 처벌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거짓진술이나 허위자료 제출 등으로 수사나 재판 절차를 막거나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사법방해죄가 없다. 적법절차원칙이나 위법수집 증거 배제원칙은 위법한 압수수색을 비롯한 수사 과정의 위법행위를 억제하고 재발을 방지함으로써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자 형사소송법에 명문화된 중요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하거나 증거를 인멸해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 ‘야만의 시대’가 용인된다면 적법절차원칙의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다.
김주영 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