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에서 20일까지 서울에서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미래세대를 위한 민주주의’를 주제로 개최됐다. 정상회의는 화상으로 진행됐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해 29개국의 장관급 인사가 한국을 찾은 가운데 장관급 회의와 전문가 회의도 열렸다.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주도로 2021년 출범한 회의체다. 첫 회의와 2차 회의는 모두 미국에서 개최됐다. 이번에 처음으로 미국 밖에서 열렸는데,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비록 대중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의미가 무엇인지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특히 자유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는 외래의 이념이자 제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새로운 진로였다. 왕조의 몰락과 식민지로의 전락을 겪으면서 한반도에는 사상적 공백이 생겼고, 다양한 외래 사상과 사조가 소개됐지만 어느 것도 현실에 쉽게 뿌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해방을 전기로 자유민주주의가 미·소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계기 속에서 미국을 통해 우리에게 소개됐을 때 우리는 그것을 택했다. 이는 단순한 수입이나 모방이 아니라 의식적 행동이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 근대화의 길이며 우리의 살길이라는 분명한 실천적 목표 의식이 있었다. 이러한 선택에서 이승만 같은 지도자의 역할이 컸지만, 선택은 집단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우리 민족이 국제정치에서 고립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아직도 국토의 반분을 강점하고 있는 공산제국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최선의 도덕적 권리요, 현존하는 정치체제 중에서는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최대한 신장시킬 정치체제’였다. 1953년 창간에서 1970년 폐간 때까지 우리나라 지성계를 풍미했던 잡지 ‘사상계’의 1961년 8월호 권두언에 적힌 말이다.
민주주의가 근대화의 열쇠라는 인식은 민주화운동의 지속적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소위 ‘87년 체제’로 현실화한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신념의 결과물이었다. ‘사상계’의 발행인이었던 장준하는 반유신운동에 앞장섰으며, 1975년 실족사로 발표된 그의 죽음은 정권에 의한 타살이라는 의혹을 남긴 채 아직도 의문사로 분류돼 있다.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오랜 논쟁 끝에 학계는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를 촉진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대강의 합의에 도달했다. 또 민주주의는 당사국 시민의 적극적 의지 없이 외부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부과될 수 없다는 것도 정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서독과 일본에 민주주의가 승전국에 의해 이식된 사례가 있지만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수한 사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냉전을 계기로 도입됐고, 민주화는 경제성장으로 촉진됐지만 애초에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타는 목마름’이 없었다면 성공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자유민주주의는 우리의 의식적 선택과 분투로 이룩한 것으로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요 요인이 됐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이 목도되고 있듯이 민주주의는 유지와 발전을 위한 지속적 관심과 노력이 없으면 쉽게 퇴락할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연대는 그러한 관심과 노력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좋은 민주주의의 실천적 구현은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제고해 민주주의의 국제적 재확산을 위한 자극이 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연대가 배타적 진영화로 비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마상윤(가톨릭대 교수·국제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