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부활로… 기다림의 토요일 침묵 속 묵상을

입력 2024-03-30 03:0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성금요일 다음 날인 토요일은 부활주일 사이에 낀 날로 기독교 전통에서는 침묵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는 날로 지내왔다. ‘거룩한 기다림의 날’인 이날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정돈하고 구속의 신비를 묵상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다음 날. 유대인에게는 안식일. 교회력 사순절의 마지막 날이자 고난주간의 끝날이다. 이날은 역사적으로 AD 33년 4월 4일 토요일에 해당한다. 이 토요일은 성경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추정컨대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날 아침을 맞았을 것이다. 유대인 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됐지만 군중들의 폭동은 더 없었다.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폭동과 살인죄로 기소됐던 바라바를 풀어주며 혼란을 일단락지었다. 외교적 갈등도 비껴갔고 로마 당국과 유대인 리더 그룹은 새로운 동맹을 다졌다. 토요일 아침은 그렇게 고요했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에겐 침묵의 날이었다.

마태복음만 언급

성경에서 토요일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로 시작하는 27장 62절부터다. 이날 빌라도 총독은 성전에서 온 대표단을 맞는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말한다. “각하, 그 거짓말쟁이가 살아 있을 때 3일 만에 자기가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3일까지는 그 무덤을 잘 지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전보다 이후의 일이 더 어지러워질 것입니다.”(현대인의성경)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여러분에게 경계병이 있으니 데리고 가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잘 지키시오” 하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봉인하고 무덤을 지켰다. 따라서 부활 이후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쳤다는 루머나 고발은 맞지 않는다. 성경은 그러나 경비병들이 나중에 빈 무덤을 확인하고 대제사장에게 보고했고 그러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고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도둑질했다’고 거짓으로 말함으로써 그 말이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고 기록한다.

앞서 전날인 금요일 저녁 유대인 동네인 아리마태아(아리마대)에서 온 부자이자 예수의 제자,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빌라도는 시신을 넘겨주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신의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닫았다. 막달라 마리아 등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은 무덤과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살펴봤고 무덤을 향해 앉아 있었다.(마 27:57~61, 눅 23:50~56)

기독교인에게 이날은?

이른바 ‘성토요일’은 수난의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놓여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신학자들은 “역사적,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단언한다. 안덕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는 29일 “이날은 죽음과 부활 사이, 그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거룩한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아직 무덤에 계시지만 곧 부활하실 그분을 기다리며 마음을 정돈하고 구속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감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도의 삶이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과 잇닿아 있다는 소망을 되새기는 소중한 날”이라고 말했다.

김명실 영남신대(예배설교학) 교수는 “전 세계 많은 교회가 예레미야애가 3장 19~26절 말씀으로 토요일을 묵상한다. 그날은 침묵의 시간이다. 뭔가를 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침묵하는 것 혹은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것을 추천한다”며 “이날 만큼은 자기를 내려놓고 무덤에 계신 주님과 함께 침묵으로 묵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레미야애가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는 토요일 하루를 시작할 때와 하루를 정리할 때 성경 읽기를 추천했다. 오전은 시편 64편 70편, 이사야 38장 10~20절을, 오후는 시편 70편(반복) 116편 143편 등을 추천했다.

예수님의 영혼은 무얼 하셨을까

침묵과 기대의 토요일. 하지만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었다면 그분의 영혼은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으로 흔히 인용되는 구절이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이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하지만 이 말씀은 난해 구절로 알려져 있다.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해석된다. ‘성경신학 스터디 바이블’에 따르면 우선 전통적인 해석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토요일에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구절로 활용됐다. 그때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자들의 영혼에게 또는 하나님이 홍수를 내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인간들을 자극했던 타락한 천사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둘째 견해는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께서 노아의 홍수로 멸망한 악한 세대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셋째 견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옥에 있는 영들’로 대표되는 세력, 곧 세상이 지금까지 경험한 가장 극단적인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선포였다는 것이다.

박종환 실천신대(예배학) 교수는 “토요일에 그리스도가 한 일에 관해 음부 강하나 연옥 등 다양한 해석은 있지만 성경만 봐서는 정확히 뭘 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현대 신학은 토요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데 주목한다”고 했다.

박 교수는 “토요일은 그리스도가 부활을 앞둔 시간이다. 제자들 입장에선 모든 기대가 무너진 실패와 절망의 시간이었을 것”이라며 “우리 삶 대부분도 제자들이 처한 토요일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했다. 기다리는 게 이뤄지지 않아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 토요일이 우리 일상과 닮았다는 것이다. 이를 ‘토요일의 신학’이라고 명명한 박 교수는 “이날만큼은 구체적 생각을 내려놓고 나를 성찰하며 하나님에게 분리되는 고통을 그리스도가 어떻게 감당했는가를 묵상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것이 깊어질수록 부활의 기쁨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성토요일 신학’을 다룬 책 ‘성령과 트라우마’(한국기독교연구소)를 번역한 박시형 야곱의우물교회 목사는 베드로전서 구절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일 것”으로 봤다. 박 목사는 “죽은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게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었지만 후대로 오면서 배격됐다”며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성자의 그 모든 고통과 절망을 목격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령과 달리 우리는 고통을 직시하기보단 서둘러 부활의 승리를 찬양하려 한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계속 듣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박 목사는 “아직도 부활 직전 토요일에 머물러 있는, 절망 속에 빠진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며 부활절을 앞두고 특별히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해 중보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당신의 아픔에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상처 회복이 더뎌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은정 최기영 양민경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