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들이 떠난 대학병원에 병원을 떠나지 않은 ‘손’이 있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신관 2층 로비엔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강희덕(76) 명예교수의 조각 작품 ‘치유의 손’이 설치돼 있다. 작품의 모델은 서중근(74·남포교회 은퇴장로) 박사. 그는 2015년 정년퇴임을 했지만 그의 손을 닮은 ‘치유의 손’과 ‘위로의 손’은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으로 얼룩진 의료계 현실과는 상관없이 병원을 찾는 환자와 가족들, 수술을 앞둔 환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이 작품을 만든 강 교수는 현역 교수이던 2003년 12월 극심한 허리통증과 하지방사통으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 서 박사의 집도로 건강을 극적으로 회복한 것이 계기가 됐다. 강 교수는 서 박사에게 감동과 감사의 의미가 담긴 작품을 만들기 시작해 2년 만에 완성해 기증했다.
치유의 손은 19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한시도 쉬지 않고 찾는 이들에게 반갑게 손을 내밀고 각자에게 맞는 말과 어투로 속삭인다. 각종 질병으로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작지만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른 허리춤 높이의 작품은 누구나 만질 수 있도록 개방돼 있다. 작품에 손을 얹는 이들의 표정엔 저마다 사연이 깊다. 오랜 병상을 떨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표정엔 행복한 미소가 넘치지만 막 수술에 들어간 가족들은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조각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어려운 수술도 척척 해내는 고마운 의사의 손, 또는 따뜻한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게 하는 그 작품에서 치유와 위로를 받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조각상은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하다. 작가는 연분홍빛이 나는 대리석에 아픈 곳을 감싸는 형상을 실감 나게 다듬어냈다. 피부를 뚫고 올라온 듯한 강한 힘줄과 핏줄, 굵은 마디의 손가락, 손 주름 등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누군가를 향해 자비를 베푸는 손, 또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그 손에는 상심한 사람을 어루만지고 깨진 사람을 품어주는 사랑이 담겨 있다.
서 박사는 9년 전 정년 퇴임 후 2020년 6월까지 제자가 운영하는 청담튼튼병원 명예병원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명지성모병원 명예원장을 역임하는 등 쉬지 않고 의사 가운을 입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 신경외과에서 현역 과장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병원의 주된 설립 목적은 산업재해 환자에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치료는 통상적인 질환치료와 재활치료를 모두 포함한다. 산업재해 환자뿐 아니라 주변의 일반 환자도 많이 찾는 보통 병원이기도 하다.
서 박사는 병원은 환자에게 숨기지 말고 병을 알려야 낫는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수였다. 그는 목과 어깨, 요통 등 통증 분야 달인으로 통했다. 한국교회언론회 대표를 지낸 박봉상(한국군목회 이사장) 원로목사와 가수로 출발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 역으로 인생 역전 드라마를 쓴 배우 윤형렬도 서 박사의 손을 통해 치료의 은총을 입었다. 그가 치료한 수술 환자는 40여년간 3만여명이다. ‘치유의 손’을 통해 새 삶을 얻은 이들이 ‘은복회’(주님의 은혜를 받는 복된 모임)도 만들었다. 100여명에 달하는 은복회원들은 매년 스승의날과 연말연시 등에 힐링 콘서트와 친교 모임을 갖는다. 서 박사의 의료 봉사와 특강에도 동행해 환자들에게 체험담을 전하며 용기를 주기도 한다.
서 박사의 집안은 조부로부터 손자 대까지 4대에 걸쳐 기독교 집안이다.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성모병원 응급의학과 과장인 아들까지 포함하면 3대째 의사 가문이다. 그는 1968년 대전고를 나와 74년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82년 신경외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부 서홍선은 해공 신익희 선생과 함께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부친 서승호 장로는 대전 은행동에서 ‘서외과’를 30년간 운영하다 은퇴 후 ‘사랑의 배달촌’에서 봉사활동에 힘쓰다 2000년 3월 소천했다.
서 박사는 부친으로부터 “의사는 돈과 결탁하면 안 된다. 돈을 사랑하면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는 의사 윤리를 배웠다”면서 “1만개 약보다 사랑의 힘이 더 세다는 신념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말했다.
지난 25일 인천 부평구 인천병원 진료실에서 만난 서 박사는 인생은 하나의 조각 작품 같다고 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는 흙이었고 조각가가 처음에 원석을 놓고 조각할 때는 그저 투박한 돌에 불과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 박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손은 하나님의 손”이라면서 “병든 인간의 몸을 하나님이 만지실 때 인간은 비로소 손상된 자아를 치유 받게 된다”고 말했다.
서 박사에게 미래의 병원 모습은 어떤 곳일까.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할 일이 많은 병원으로 변할 것이라고 했다. 치료와 건강 증진, 아름답게 죽음을 대비하는 일과 함께 치유 예술관의 소임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작은 음악회, 어린이를 위한 연극도 열어야 하고 영화 감상실과 도서관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전문가가 스스로 결정권을 갖고 운영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서 박사는 또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3~16)라고 말씀하신 까닭을 설명했다. 소금과 빛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소금과 빛을 예로 들어서 믿는 자들이 꼭 그와 같은 존재들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얘기다.
서 박사는 수술은 인간이 하지만 치유는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서 박사는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을 거의 다 기억할 정도로 환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환자를 대할 때는 환자의 병력을 꼼꼼히 알아보고 가족처럼 대하며 공감할 수 있는 진료를 강조한다. 치유의 손은 각종 질병으로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작지만 큰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전한다.
“제가 나이 칠십을 훌쩍 넘겼지만 이렇게 건강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새벽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특별한 보약을 먹고 있습니다. 바로 ‘구약’과 ‘신약’이지요(웃음). 이것이 인생 최고의 건강 비결입니다.”
서 박사는 35년째 서울 송파구 남포교회(최태준 목사, 박영선 원로목사)에 출석한다. 2년 전 은퇴 장로가 된 그는 현역 교수 시절 병원과 집, 그리고 교회 외에는 별로 가는 곳이 없을 정도로 외길을 걸었다. 지금도 ‘남포교회 새벽 활성화모임(남새활)’을 이끌고 있다. 7년 전 창설한 남새활은 오늘도 쉬지 않고 기도로 힘을 보태는 등 고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서 박사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환자를 수술하고 회복시키는 일을 이어갈 작정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손은 하나님의 손이라고 말한다. “상처를 치료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죄로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만지실 때 인간은 비로소 손상된 자아를 치유 받게 됩니다.”
어떤 병원이 좋은 병원이냐는 우문에 서 박사는 “뭐니 뭐니 해도 병을 잘 고쳐주는 병원이 좋은 병원”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좋은 병원이 중환자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좋은 교회는 문제 많은 교인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과 함께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셨다고 했다. 참된 의사인 예수님의 눈에 세리와 죄인들은 병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외된 사람, 사람 취급받지 못한 사람, 그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했다.
서 박사는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면서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셨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식사도 하셨음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능력 있고 생명 있는 모습이 되기를 축원한다고 했다.
서 박사는 후배 의사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은 같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해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를 위해 사랑의 의술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하는 것이지요.”
글·사진=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