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참사’ 푸틴 타격… ‘초국가적 위협’ 이슬람 테러리즘 재부상

입력 2024-03-25 04:07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대형 공연장 크로커스 시티홀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한 지난 22일(현지시간) 무장한 주방위군 대원이 테러범들의 방화로 화염에 휩싸인 공연장 앞을 경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한 공연장에서 22일(현지시간) 발생한 초대형 테러는 최근 5선을 확정 지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큰 타격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가 테러의 배후를 자처했음에도 푸틴 대통령이 이번 테러를 우크라이나와 연결 지으려 애쓰는 것도 테러를 막지 못한 책임론을 희석시키고 자국민의 분노를 우크라이나로 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번 테러는 푸틴 대통령이 지난 15~17일 대선에서 87%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 지 5일 만에 발생했다. 안방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서 ‘현대판 차르 대관식’의 들뜬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당선 직후 푸틴 대통령이 외친 ‘강한 러시아’도 무색하게 됐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하느라 자국 내 테러 위험을 간과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 정보당국 관계자들을 인용해 최근 몇 달간 유럽 전역에서 중앙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앞세운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조직의 테러 시도가 있었다고 전했다. 테러가 벌어지리라는 신호음이 이미 곳곳에서 들렸다는 얘기다.

게다가 테러 계획에 관한 미국의 사전 경고도 묵살했다. 주러 미국대사관은 지난 7일 “모스크바에서 콘서트 등 대규모 행사를 표적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이를 “명백한 협박이자 우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일축했다. 뉴욕타임스는 “푸틴의 대선 승리 며칠 만에 이뤄진 이번 테러는 크렘린궁의 심각한 보안 실패를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현재 유럽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전쟁’은 세계 각국에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지만, 정작 ‘이슬람 테러리즘’이라는 오랜 위협에 대한 경계심을 무뎌지게 한 측면이 있다.

IS는 텔레그램 성명을 통해 테러 배후를 자처하면서 “이번 총격 사건은 이슬람과 싸우는 국가와 IS 간 격렬한 전쟁”이라고 밝혔다.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이 격돌하는 신냉전 시대를 맞아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명해진 대립 구도 속에서 상대에 대한 반격에 치중하느라 정작 ‘공공의 적’을 놓쳤다는 것이다. WSJ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 러시아·이란·중국 등 권위주의 국가들 간 대립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계기로 뚜렷해졌다”며 “하지만 이들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는 전멸시켜야 할 적들”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테러는 두 진영 모두 이슬람 테러리즘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는 분명한 경계 신호다. 미국의 한 안보 전문가는 “격화되는 강대국 간 경쟁 따위는 IS엔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우리는 중·러와 미국 사이의 큰 분열을 보고 있지만 이슬람 과격단체들은 모두를 표적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초국가적인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