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직업 등 하나하나
따지는 풍조가 청년들의
연애 방해하는 것 아닐까
따지는 풍조가 청년들의
연애 방해하는 것 아닐까
최근 가장 좋아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은 단연 ‘나는 솔로’다. 첫 방송부터 지금까지 챙겨본다. 이 프로는 기수별로 일반인 출연자들이 나와 5박6일간 ‘솔로나라’라는 공간에 머물며 데이트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최종 선택해 커플이 되는 연애 예능 프로그램(연프)의 전형을 따른다. 한 가지 차이점은 기수마다 다소 특이한 행동을 하는 ‘빌런(악당)’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도파민(쾌락을 느낄 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을 자극하는 요소가 프로그램을 견인하는 한 축이라는 것이다. 기자도 거듭되는 빌런들의 활약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현재 방송 중인 19기 편을 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번 기수에도 빌런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들을 수 없던 말들이 온라인상에서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밸붕’이라는 단어다. 밸붕은 ‘밸런스 붕괴’의 줄임말로, PC 게임에서 유래했다. 특정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와 비교해 너무 강력한 능력을 지녀 균형이 맞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번 기수 나는 솔로에서 밸붕이 언급되는 건 시청자들이 남녀의 직업적 차이가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더 노골적으로는 여자 출연자들 직업이 남자들보다 좋다는 이유다.
여자 출연자 중엔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만화를 연재하는 웹툰 작가가 있고, 대치동 학원강사, 의사 등 소위 잘나가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반면 남자 출연자들은 대기업 인공지능(AI) 연구원을 제외하면 별로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식품업체 생산직도 있단 얘기에 네티즌들은 밸붕이라는 단어를 더 서슴지 않고 내뱉는 듯하다.
물론 회차가 지날수록 남성들이 보이는 예의 없는 행동에 기자도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 찾아 국민 앞에 모든 걸 드러내놓은 출연자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한편으론 씁쓸했다. 그동안 남자 출연자가 여자보다 나은 직업을 가졌을 땐 밸붕이란 말이 일절 나온 적이 없다.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이 출연해 소위 스펙 맞지 않는 여성과 데이트를 하고 최종 커플이 되었어도 말이다.
밸붕이란 단어의 속내에는 내심 여성보다 남성이 직업이든 학력이든 재력이든 뭐든 뛰어나야 결혼할 수 있다는 ‘상향혼’ 전제가 깔린 게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상향혼을 당연하게 여겨왔고 경제력 좋은 여성이 하향혼을 선택하면 그 결혼을 하는 남성에게 ‘셔터맨’이라고 비하하던 때도 있었다.
상향혼 욕구는 통계에도 나타난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월 발표한 ‘소득 동질혼과 가구구조가 가구소득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소득이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비율(동질혼)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에서는 고소득 남성이 저소득 여성과 결혼하는 빈도가 낮지만, 한국에서는 빈도가 소폭 높았다고 분석했다. 물론 일정 이상 돈을 버는 여성이 저소득 남성과 결혼하는 사례도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경제력이 결혼을 좌우하는 연구는 또 있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 번이라도 결혼한 적 있는 ‘혼인 비율’은 모든 연령층에서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증가했다. 특히 소득 상위 10%에 해당하는 30대 중후반(36~40세) 남성 중 91%가 결혼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하위 10%의 결혼 경험은 47%에 불과했다. 소득에 따른 남성의 결혼 가능성이 배 가까이 차이나는 셈이다.
요즘 들어선 끼리끼리 결혼하는 동질혼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의사는 의사와, 변호사는 변호사와, 대기업 직원끼리, 공무원끼리 결혼하는 식이다. 주변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무슨 일 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온다. 조건 없는 사랑은 옛말이 된 지 오래지만, 하나하나 따지는 풍조가 청년들의 연애와 결혼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연프에 과몰입했나 보다. 정신 차리고 집에서 함께 수다 떨어주는 아내에게 잘해야겠다.
김민영 산업1부 기자 m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