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을 각자의 고양된 삶과
배려 속 더불어 사는 일상에
맞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배려 속 더불어 사는 일상에
맞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울에는 종종 올라옵니까?” 울산에 정착한 이래 자주 듣는 질문이다. 이어서 “고생하셨겠네요. 오래 걸리지요?”라는 위로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대개 “KTX가 있으니까요! 두 시간 반도 안 걸립니다”라는 대답이 끝나기 전에 대화는 다음 화제로 넘어간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지방을 풍경처럼 인식한다. 동심원 한가운데 있는 서울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지방을 이해한다. 상경(上京)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듯이 응답하는 나도 서울과 지방을 위아래로 보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지방대학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비유는 어떤가. 하필이면 반가운 봄꽃을 들어 지방의 위기를 표현하는 ‘악취미’도 못마땅하지만, 지방 소멸 위기는 ‘순서대로’가 아니라 ‘동시에’ 닥치고 있어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니다. 고위공직자의 지방 발령을 ‘좌천’이라고 보도하면서 지방의료원의 의사 구인난을 우려하는 듯한 언론 기사도 혼란스럽다. 지방을 영락없이 유배지처럼 바라보는 서울의 시선으로부터 지방에 대한 ‘선량한 차별’을 읽어내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지방 위기 경보가 울렸지만 수도권으로의 집중은 완화될 기미가 없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취업자 수도 절반이 넘는다. 기업의 본사도 과반이 수도권에 있고, 인프라 쏠림도 심해지기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서울로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희생자라고도 할 수 있는 서울 사람들이, 지방을 차별하는 시선과 말에 둔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사회학자 김지혜가 말했듯이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각자가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처 차별을 포착하지 못한다.
지방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일은 당연히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구조적 접근을 동반해야 한다. 그런데 당장 자기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개인들은 그런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이 실현되기를 마냥 기다리기 어렵다. 더욱이 수도권으로 이주만 하면 지방민으로서의 불편과 차별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그래서 각지에 혁신도시를 아무리 만들어도 금요일 오후만 되면 서울로 향하는 행렬이 줄을 잇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지방민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서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차별의 시선을 감내할 것인가.
물론 선량한 차별을 넘어서서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현실을 당연시하는 상식을 밀어내고 인간 삶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지방민이라는 것은 신체에 각인된 특징도 아니고 개인 정체성의 본질이 될 수도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 앞에서 지방에서의 삶은 정말 대책이 없는 것일까. 서울과 지방 사이에 설정된 통속화된 장소의 서열이 그곳에서 영위하는 삶의 질까지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주된 관심을 각자의 고양된 삶, 사람과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맺고 배려 속에 더불어 사는 일상을 어떻게 영위할지에 맞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밀 때문에 옴짝달싹하기 어려운 서울과 달리 지역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너른 여백이 넘친다.
지방에 대한 선량한 차별이 비단 서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모든 차별이 그렇듯 차별당하는 사람의 내면에도 왜곡된 인식은 단단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서로가 자기와 다른 처지를 상상하는 것이 공감과 소통의 조건이지만 문제 해결은 역시 당사자들이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은연중에 당연시하는 지방 차별과 편견을 지적하고 거리를 두는 것도 하나의 출발이다.
편의상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었다. 하지만 수도권도, 지방도 단일하지 않다.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원적 구분 자체가 또 다른 차별이다. 모든 차별은 중층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양된 삶을 상상해야 하는 당사자이다.
허영란(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