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섭 주호주 대사와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거취 문제를 놓고 불거졌던 당정 갈등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민의힘이 요구한 ‘이 대사 즉시 귀국, 황 수석 사퇴’를 대통령실이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당정은 다시 선거 단일대오를 갖췄다. 그러나 당내에선 이 대사를 향한 사퇴 요구가 분출하고 있고 비례대표 공천 잡음도 완전히 가시지 않아 언제든 갈등이 터져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총선을 앞두고 당정이 충돌하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갈등의 불씨는 공천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인 대통령과 집권여당 대표의 주도권 다툼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총선 때마다 반복됐다. 내부 분열이 극에 달했을 때의 선거 결과는 대개 참패로 이어졌다.
‘친박 학살’ ‘비박 학살’의 끝은 참패이거나 반쪽 승리
2008년 18대 총선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2개월 된 시점에서 치러졌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대선 경선은 ‘본선보다 치열한 예선’으로 평가됐다. 경선에서 맞붙은 이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1년 넘게 검증 공방을 벌이면서 당내 분열이 극심했다.
경선 과정에서 대립한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는 공천심사위원회 구성 단계부터 삐걱댔다. 친박계는 친이계 핵심이자 당 사무총장이었던 이방호 의원이 주도한 공심위에 최소 1명이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불발됐다. 이 전 대통령이 취임 전 박 전 대통령을 만나 공정한 공천에 합의하면서 갈등은 봉합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공천 결과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등 친박계 중진이 줄줄이 탈락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분노했다. 공천 탈락한 친박 의원들은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연대를 구성해 미래 권력인 박근혜를 앞세워 선거 홍보를 펼쳤다.
한나라당은 당시 200석 이상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투표 결과 153석(지역구 131석, 비례대표 22석)을 얻는 데 그쳤다. 간신히 원내 과반에 턱걸이했다. 선거에서 승리해 국회에 입성한 친박계는 민주당과 손잡고 2010년 이명박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무산시켰다. 이는 이 전 대통령 레임덕을 가속화한 사건으로 꼽힌다.
박 전 대통령 취임 후 실시된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6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야당과 교섭해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불신임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후 당내에선 비박계 공천 학살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회는 후보자 등록 신청 마감 직전까지 유 원내대표에 대한 공천을 보류하면서 불출마를 압박했다. 친박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유 원내대표를 향해 “당 정체성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고 낙인 찍었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주도하는 공천에 반발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공천장에 대표 직인 날인을 거부하는 ‘옥새 파동’으로 맞섰다.
여권의 내부 분열은 선거 참패로 이어졌다.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갈라진 상황에서도 새누리당은 원내 과반에 한참 못 미치는 122석(지역구 105석, 비례대표 17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00년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2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부여당에 야당의 공세보다 큰 악재는 내부 분열”이라며 “권력 1인자와 2인자가 부딪히면 중도층은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선거에선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대역전 이뤄낸 선거 이면엔 ‘당정 협력’
여론조사상 열세 전망을 깨고 집권여당이 대역전을 거둔 총선 이면에는 당정 협력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의 정권심판론 공세가 거셌던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지역구 127석, 비례대표 25석)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 이 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100석도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던 때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등판한 박 전 대통령은 당 일각의 ‘대통령 탈당’ 요구에 선을 그었다. 대신 진보 진영 의제로 여겨졌던 경제 민주화, 복지를 내세워 중도층 민심을 공략했다. 공천 과정에서 정의화, 주호영, 이재오 등 친이계 핵심 인사들도 살렸다. 이 전 대통령 역시 낙천한 친이계 의원들의 탈당이나 제3세력화 구축 움직임에 제동을 걸며 측면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연대는 원내 과반 확보가 유력한 것으로 예상됐지만 패배했다.
김영삼정부 집권 4년 차에 치러진 1996년 총선도 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은 정권심판 바람에 광역지방자치단체장 15곳 중 5곳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기록했다. 총선 전망도 어두웠다. 그러자 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과 갈등을 빚다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회창 전 국무총리를 전격 영입했다. 이 전 총리는 신한국당 중앙선대위 의장을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했고 139석(지역구 121석, 전국구 18석)을 얻으며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는 “대통령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면 국회 의석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장기적으로는 정권을 뺏기면 안 된다는 목표하에 여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