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서재에 책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

입력 2024-03-23 04:01

방 안 가득 쌓인 책들을 보며 오늘도 한숨 짓는 애서가들이여! 사실 그 한숨은 많은 책을 정리하지 못해 내뱉는 고통이면서 동시에 벅차오르는 뿌듯함의 증거이기도 하다. 집 안 곳곳에 책이 너무 많아 정리할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을 때의 기묘한 희열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런데 책을 가득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 책 정리에 손 놓고 있는가 하면 절대 아니다. 이들의 책 정리는 시시포스의 노동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요즘같이 봄이 다가오는 계절이면 읽지 않는 책을 골라 끈으로 묶어 밖에 내다 놓거나 헌책방 일꾼을 불러 팔기도 한다. 어떤 애서가는 친구들을 불러 서재에서 맘에 드는 책을 골라 가라며 호탕한 기질을 자랑한다. 이렇게 하면 당연히 책장이 좀 가벼워질 것도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책이 더 많아지기도 한다. 책이 새끼라도 치는 걸까. 왜 그런지는 애서가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건 나와 같은 제삼자가 한 발짝 떨어져서 봐야 알 수 있는 수수께끼다.

책 정리의 기본이라면 잘 보지 않는 책을 우선 처분하는 것이다. 오래된 번역서이거나 수십 년 전에 쓰인 두꺼운 인문서 등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처분하고 나서가 문제다. 애서가는 무의식적으로 처분한 옛 번역서의 개역판이 나왔는지를 인터넷 서점에서 찾는다. 오래전에 인기 있어서 샀던 인문서를 대체할 최근 학자의 책을 밤을 새워가며 탐색한다.

나만 해도 윌 듀랜트가 쓴 ‘철학 이야기’와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최근에 정리했다. 그리고 최근 완간된 네 권짜리 소운 이정우 ‘세계 철학사’를 새로 들였다. 앞선 두 책이 모두 명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계 철학사가 이들을 대체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뿔싸! 세계 철학사는 권당 800쪽 내외의 대작이다. 당연하게도 정리한 두 책의 부피를 가볍게 초과해 버렸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도 얼마 전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로 대체했다. 앞의 책도 여전히 훌륭하지만 초판은 1950년대에 나왔다. 이젠 2000년대에 쓰인 책을 봐야겠다며 당차게 유럽문화사 세트를 주문했는데, 이 역시도 하우저의 책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지금도 답답한 서재에 앉아 동굴 속 석순처럼 멋대로 쌓여가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애서가 여러분! 매일 책 정리를 하는데 왜 책이 줄지 않는지 이제 그 이유 중 하나를 알게 됐을 겁니다.

예시가 나였지만, 이건 비단 내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도 이사 전에 책을 좀 정리한다며 우리 헌책방에 스무 권 남짓 책을 가져온 손님이 있었다. 정작 집에 돌아갈 때는 갖고 온 것보다 많은 책을 사고 말았다. 이 사건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당신. 서재 정리가 안 된다며 실망하지 말고 긍정적인 면도 봐주길 바란다. 여러분이야말로 침체를 겪는 우리나라 출판계에 없어서는 안 될 보석과도 같은 존재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