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규리의 고향

입력 2024-03-23 04:08

초등학교 6학년 규리가 충북 단양 가곡초 대곡분교에 전학 온 건 3년 전이다. 이곳에서 규리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간식을 먹고 뒷동산에 올라 수다를 떤다. 여름엔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하고 겨울엔 눈싸움을 하거나 비닐포대를 빌려 뒷산에서 썰매를 탄다. 플루트를 배우고 밴드에서 드럼도 친다. 서울에서의 하루, 그러니까 학교가 끝나고도 학원을 서너 개씩 다닌 뒤 그 학원 숙제까지 마쳐서야 밤늦게 잠들던 일상은 이제 옛날처럼 까마득하다.

서울 토박이였던 규리가 이곳에 온 건 우연한 계기였다. 사촌언니를 따라 일주일짜리 농촌유학 체험 캠프에 갔다가 친구를 잔뜩 사귀었고, 그 친구들과 계속 놀고 싶었던 둘은 부모님을 졸랐다. 전학을 가려면 주소지도 옮겨야 했기에 두 아이는 그해 단양군민이 됐다. 열한 살 나이에 귀농한 셈이다. 처음엔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울기도 했지만 이곳 생활이 재밌어서 견딜 만했다고, 한 달 정도 지나니 금방 괜찮아졌다고 규리는 말했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배우는 건 노는 법뿐만이 아니다. “길 가다 만나는 어르신들께 웃으며 인사하면 기분이 좋다”고 규리는 수줍게 말했다. 어머니는 항상 대장 노릇만 하면서 여덟 살 터울 오빠에게도 대들던 규리가 이제 인사성 밝은 아이가 됐다고 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다르다. 서울이라면 친한 무리가 나뉘기 마련이겠지만 여기선 너나 할 것 없이 어울려 다닌다.

규리가 지내는 곳은 마을에 있는 농촌유학센터다. 아이들은 학년이나 나이 구분 없이 섞여 남녀 기숙사 생활을 한다. 20년 가까이 운영하는 동안 고등학교까지 이곳에서 마친 아이도 많다. 아이를 따라 가족 전체가 귀농을 택한 부모도 여럿이다. 같이 온 사촌언니 서현이 역시 올해 인근 소백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서울 출신인 우리에겐 고향이란 게 없는데, 단양이 애들한텐 고향 같은 존재가 됐다”고 서현이 아버지는 말했다.

이런 모습은 오래가지 못할지 모른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살리기의 하나로 십수년째 해오던 지원 사업이 올해 별 명분도, 설명도 없이 완전히 폐기됐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인건비조차 지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아이들은 얼마 전 선생님을 한 분 떠나보냈다. 해오던 교육 프로그램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지자체가 직접 나선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전국 30여개 농촌유학센터는 이곳처럼 대부분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센터의 미래가 불투명해질수록 도시로 돌아갈지 고민하는 아이와 부모는 늘고 있다. 규리 부모님은 일단 이번 학기 규리를 단양에 남겼지만 걱정이 많다. 정부 지원이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아이들도 더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규리와 친구 할 아이들도 그만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규리 역시 이번 학기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여기서 학교를 더 다니고 싶다”고 말하는 규리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아이 입장에서 농촌유학센터가 중요한 건 이곳이 공교육 틀 안에서 시도하는 대안적 교육의 공간이라서다. 민간 영역의 대안 교육이 종종 또 다른 엘리트 사교육으로 변질되는 걸 생각하면 그 중요성은 더 크다. 적어도 이곳에서 아이들은 출세만을 위한 도시의 경쟁 일변도 교육 환경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공교육의 본래 목적에 가까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교육에 한 걸음이라도 가깝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을에 아이들을 남기는 건 교육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마을 역시 아이들에게 단단히 의지하고 있어서다. 서너 명을 빼면 농촌유학생으로 거진 채워진 가곡초 대곡분교의 학생 수는 이미 본교를 넘어섰다. 소백산중은 신입생 11명 가운데 4명이 농촌유학생이다. 농촌유학 온 아이들 없인 이 학교들이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할 게 없다. 소멸해가는 지역 기반시설을 아이들이 살려놓고 있는 셈이다. 늙고 비어가는 마을에 아이들 웃음소리는 그 자체로 큰 힘이다.

물론 농촌유학센터만으로 죽어가는 농촌을 살릴 수 있을 리 없다. 이곳이 도시의 숨 막히는 학교생활의 유일한 대안이 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나마 남은 작은 버팀목, 좁은 해방구마저 없앤다면 우리가 향해야 하는 곳이 어딘지부터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야 할 종착지가 송두리째 말라붙은 고향과 각자도생의 교육 환경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 말이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