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 눈에 밟혀 힘들어도 버틴다”

입력 2024-03-20 04:09
전공의 집단사직 사태가 한 달째 이어지며 진료 공백이 길어지고 있다. 지난 17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의사와 환자, 보호자가 나란히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19일 오전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 내과 병동. 교수 A씨는 입원 환자를 보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집단사직 동참 의사를 묻자 “환자 예약이 다음 달까지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사직서를 내겠느냐”며 “지금 사직하면 환자에게는 직격탄”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병동 내 또 다른 교수는 “파업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면서도 “환자들이 해외로 원정진료까지 받으러 가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공의 집단사직이 한 달을 넘긴 데 이어 오는 25일 의대 교수마저 대거 병원을 떠날 예정이다. 하지만 끝까지 병원에 남겠다고 선언한 의사도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에 대한 찬반을 떠나 환자 곁을 지키는 게 의사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병원에 남은 건 정부의 2000명 의대 증원 방침에 동의하기 때문은 아니다. “제발 자리를 지켜 달라”는 환자들이 마음에 걸려서다. 서울대병원 내과 계열 교수 B씨도 25일로 예고된 교수 일괄 사직을 두고 고민이 깊다고 했다. 그는 “환자들이 눈에 밟히니까 힘들더라도 버티고 있다”며 “교수들까지 나가버리면 환자 입장에선 자신들이 어떻게 되든 의사들이 다 떠나버린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의료진도 이들을 그냥 버릴 순 없다”고 말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병원에 남은 의료진도 많다.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교수는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출근했다. 그는 “환자에 대한 사명감으로 계속 일하고 있다. 지금 교수들 대부분이 마찬가지 상태일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교수도 “사직서를 냈지만 이 방법으로 어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현장의 고충을 털어놨다.

전공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의료진도 한 달 새 쌓인 피로감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교수 한 명이 일주일에 세 번씩 당직을 서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이날 서울아산병원 병동에서 만난 교수는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그는 “곧 환갑인데 이러다 내가 죽겠다. 잠도 못 자고 당직을 섰는데 밥 먹을 시간도 없다”며 급히 자리를 떴다. 외과 계열 교수 C씨는 “환자와 자식 같은 전공의들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지만 우리도 이제 한계”라고 전했다.

병원에 남은 의사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떠난 의사와의 ‘갈라치기’다. 이날 오전 당직근무를 마치고 나오던 명지병원 외과 병동 전문의는 “사직은 의사의 입장을 한 번 봐 달라는 일종의 호소”라며 “사직한다는 분도 환자 보겠다고 몇십 년 쏟아부은 사람들이다. 환자를 버린 게 아니다. 나쁜 의사, 좋은 의사로 양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루빨리 정부와 의료진이 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서울아산병원 내과 계열 교수 D씨는 “전공의들이 상처를 많이 받은 상황이라 다시 오라고 설득하기 어렵다”며 “의료 시스템을 놓고 장기적으로 머리를 맞대야 하는 관계인데, 이렇게 강대강으로 붙는 상황은 교수들이 볼 때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신영 김용현 기자 spiri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