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재판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법원장으로서 재판을 다시 하게 돼 영광입니다.”
18일 오후 2시 서울행정법원 B206호 법정. 김국현 서울행정법원장이 법대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이날 김 법원장이 재판장인 장기미제사건 전담재판부(행정9부)는 재판부 신설 후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재판 지연 해소 방안 중 하나로 제시한 ‘법원장 재판부’가 본격 가동된 것이다.
김 법원장은 이날 법원에 접수된 지 3년 이상 된 장기미제사건 14건의 재판을 진행했다. 그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병원에 대한 요양급여 환수 처분을 놓고 불거진 사건에서 공단 측에 ‘신속한 재판 진행’ 방침을 강조했다. 김 법원장은 “이 사건은 2019년에 시작됐고, 관련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도 3년6개월 이상 지났다. 그간의 불이익을 병원 측이 그대로 감수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단이 후속 처분을 어떻게 할지 신속한 의견을 내 달라는 취지다.
법원장은 그간 사법행정 업무를 주로 맡아 직접 재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전국 법원에 법원장 재판부가 신설되면서 앞으론 관록 있는 ‘베테랑’ 법원장들의 재판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될 전망이다. 김 법원장은 형사재판 경과를 보기 위해 중단됐던 재판을 언급하며 “형사재판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 재판대로 진행하겠다”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해 12월 11일 취임 후 재판 지연 해결을 위해 법원장의 솔선수범을 당부한 바 있다. 이날 오전 11시에는 박형순 서울북부지법원장이 민사10부 재판장을 맡아 장기미제사건의 변론을 열었다. 윤준 서울고등법원장은 다음 달 18일, 김정중 서울중앙지법원장은 오는 28일 잇따라 재판 변론기일을 진행한다. 사법부 고위직부터 재판 업무에 모범을 보이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9일 취임 100일을 맞는 조 대법원장은 ‘법원장 재판부’를 포함해 재판 지연 문제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놓고 개혁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법원장 추천제 폐지 등 김명수 전 대법원장 ‘유산 지우기’에 나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전 대법원장이 도입한 후 사실상 인기투표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은 법원장 추천제는 폐지로 가닥이 잡혔다. 대법원은 김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권한을 약화하기 위해 도입했던 ‘사법행정 자문회의’ 폐지도 검토 중이다. 한 재경법원 부장판사는 “두 제도는 전임 대법원장의 가장 중요한 정책적 유산”이라며 “폐지는 곧 ‘김명수 지우기’로 평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9년 폐지됐던 전국 수석부장판사 회의도 5년 만에 부활했다. 사법농단 사건 당시 법원행정처가 각급 법원 수석부장판사를 매개로 일선 재판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일면서 폐지됐던 행사다.
대법원은 법관증원법 통과를 위한 국회 설득 작업도 준비 중이다. 법원은 법관증원을 재판 지연 해결의 핵심 방안으로 꼽는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2월 법관 임용 관련 연구를 이어온 김신유(47·사법연수원 35기) 부장판사를 국회 파견 법관으로 발령냈다.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의 법관 증원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인사”라고 말했다. 다만 법관증원법은 21대 국회 통과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일각에선 재판 및 인사 제도와 관련한 구체적인 개선 방안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적어도 자기 집단 사람들로만 법원을 운영하지는 않는다’는 명확한 메시지는 줬다”면서도 “아직 눈에 띄는 제도 변화는 이뤄지지 않아 대법원장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장 재판은 상징적 의미는 있겠지만 근본 해결 방안으로 보기 어렵다”며 “판사로서 일할 의욕을 높여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등도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한주 이형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