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결정의 본질

입력 2024-03-18 04:25 수정 2024-03-18 04:30

떴다방 정당 판치는 비례대표
권력자 의중에 치중한 지역구

똑 부러진 결정 내리지 못하는
부동층 유권자는 난감할 뿐

크든 작든 선택은 늘 어렵지만
어떤 쪽도 우유부단보단 낫다

선택과 결정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번 22대 총선은 유난히 선택지가 많아 결정이 쉽지 않다. 우선 비례대표 투표용지부터 걱정이다. 여백을 포함해 80㎝에 달하는 역대급이 될 것이라고 한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는다지만 급조된 위성정당인 ‘떴다방’ 정당이 대거 비례대표 후보자를 내고 정당명부 투표지에 이름을 올리면 21대 총선이 세운 신기록을 4년 만에 갈아치울 모양새다.

지역구 투표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여야 간 첨예한 정쟁뿐만 아니라 각 당의 경선 과정에서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친윤영남·비윤험지, 친명횡재·비명횡사란다. 조씨가 날자 이씨가 떨어진다는 조비이락, 금배지를 달면 무죄, 떨어지면 유죄라는 유금무죄·무금유죄 등 갖가지 조어가 난무한다. 확증편향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면 부동층(浮動層) 유권자는 참 난감하다.

빨간약(red pill)과 파란약(blue pill) 사이에서 고민한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와 같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똑 부러진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 시간과 돈 같은 우리가 보유한 자원은 유한하므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위험이 늘 도사린다. 그런 약점에 무임승차하는 기회주의자가 많아지면 시스템 전체 차원에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작위(作爲)는 그 지나침에서 오는 과잉의 오류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부작위(不作爲)는 그 모자람에서 오는 생략의 오류를 안고 있다. 주주나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또는 이양받아 기관을 운영하는 이들에게 전자는 직권남용, 후자는 직무유기를 의미한다.

사표(死票) 방지와 소수자 보호라는 좋은 도입 취지에도 불구하고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도는 작위의 오류, 즉 직권남용의 늪에 빠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벌이는 의원 꿔주기 행태도 희대의 직권남용이다. 진작에 풀었어야 할 선거제도 개편 문제는 여의도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수십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이는 국회의 직무유기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비위(非爲)는 어떨까. 선거 민주주의는 늘 최선은 아니지만, 한 정치 공동체가 최악은 면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선거 결과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시도는 엄연히 중범죄고, 공정한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어떤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트럼프는 임기 말 그 둘을 다 저지른 덕분에 현재 형사적으로 기소된 상태다. 지난 3년 사이 90개 넘게 불어난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그는 재집권에 더욱더 필사적이다. 자신의 비위가 미국과 세계 민주주의에 끼칠 악영향이나 세간의 조롱쯤은 안중에도 없다.

우유부단, 햄릿증후군 또는 결정장애에 빠지는 것도 문제다. 통계학에서 무작위(無作爲)란 똑같은 확률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질서도가 높아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극히 낮아진다. 불확실성이 높으니 자칫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결정장애에 빠지게 된다.

더 나아가 한 공동체의 무질서도나 불확실성이 커지면, 즉 정치적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하면, 그 구성원은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에 빠진다. 매사에 대한민국 정치의 후진성을 탓하면서도 막상 선거일에는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이들이 그렇다. 선거 민주주의는 확증편향의 극성 팬덤 정치뿐만 아니라 그 어두운 그림자인 집단행동의 딜레마에도 취약하다. 뿔뿔이 흩어져 구시렁거리기만 하는 우리 주위의 햄릿들은 두꺼운 얼굴과 검은 마음을 가진 후흑(厚黑) 정치인의 최애 먹잇감이다. 현혹하기 쉬울뿐더러 당선 후 아무 책임도 질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결정의 본질을 관찰자는 알 수 없다- 종종 실제로는 결정자 자신도 그렇다(The essence of ultimate decision remains impenetrable to the observer - often, indeed, to the decider himself).”

냉전 시대 구소련과의 핵전쟁 위기 속에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13일간 동분서주했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그렇다. 선택과 결정은 크든 작든 늘 어렵다. 그래도 어떤 결정이든 우유부단보다는 낫지 않을까.

구민교(서울대 교수·행정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