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에서 자주 회자되는 불출마 번복 사례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86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이듬해 13대 대선 때 출마한 일이다. 하지만 DJ의 번복 과정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불출마를 내걸었다. 또 자신이 불출마한다고 해야 86년 5·3 인천 사태와 10·28 건국대 점거 사건 등을 핑계로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도 했다. 이런 DJ의 끈질긴 요구와 국민들 저항으로 전두환은 이듬해 직선제를 수용했다.
그 정도 결기와 정치적 결실까지 바라진 않지만 요즘 나오는 불출마 선언은 가볍기가 병아리 솜털 같다. 국민의힘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이 9일 여당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한 일이 대표적이다. 그는 혁신위원장일 때 “총선에서 지역구 포함 일체의 선출직 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출마설이 나올 때마다 “이미 불출마를 선언하지 않았느냐”고 대꾸하더니 결국 말을 뒤집었다.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는 보름 전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으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일을 거론하며 당에 부담을 안 주고 “희생양이 되겠다”면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랬던 그가 8일 조국혁신당에 입당했다. 그는 비례대표로 출마하느냐는 질문에 “당과 상의하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불출마 번복이란 지적엔 “대전 지역구에서 재선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불출마한다는 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서울 서대문갑에서 출마를 준비하다 전략지역구가 되자 불출마를 선언했던 이수진 민주당 의원도 유권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케이스다. 불출마 선언 하루 만에 “성남을 지키는 게 당을 지키는 일”이라며 연고도 없는 곳에 돌연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엄중한 불출마 선언마저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없던 일이 돼 버리는 게 정치 세태인데, 앞으로 정치인들이 그 어떤 말을 한들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국민들만 ‘의문의 1패’를 당한 셈이다.
손병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