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창의적 연출가들의 산실… 영화도 매력적”

입력 2024-03-10 19:24
사샤 로이드 A24 인터내셔널 대표는 “한국은 창의적인 연출자들의 산실”이라며 한국 창작자를 높이 평가했다. 최근 ‘패스트 라이브즈’ ‘성난 사람들’ 등 한국을 소재로 삼고, 한국 창작자들과 함께 작업한 이유는 “작품의 수준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CJ ENM 제공

A24는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제작사 중 하나다. 올해 골든글로브를 비롯한 유수의 시상식을 휩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와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이 A24의 작품이다. 윤여정에게 한국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겨 준 영화 ‘미나리’도 A24가 제작했다. ‘패스트 라이브즈’ 국내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사샤 로이드 A24 인터내셔널 대표를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은 창의적인 연출자들의 산실이다. 그래서 한국영화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고, 최고의 연출자를 찾다 보면 한국으로 계속 돌아오게 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최근 A24가 제작해 주목받은 작품들에는 공교롭게도 한국 출신 감독과 배우들이 참여했다. 이들 작품은 공통적으로 이민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도, ‘성난 사람들’도 특정 장르여서가 아니라 창작자가 제시한 이야기의 힘에 끌렸다고 그는 말했다.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인 ‘패스트 라이브즈’는 10일(현지시간)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라 있다.

로이드 대표는 “시나리오에서 이야기의 진정성과 독창성, 감독의 비전을 발견했다. 장르와 상관없이 작품의 수준이 매우 뛰어났다”면서 “전 세계에 그런 영화를 원하는 관객층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고, 결과로 증명해 냈다. 의사 결정의 중심에는 항상 창작자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사진. CJ ENM 제공

CJ ENM과 공동제작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양사의 신뢰와 상호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성사된 프로젝트다. CJ ENM은 이 영화로 ‘기생충’(2019) 이후 처음으로 오스카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인터뷰에 함께 한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부장은 “문화면에서는 할리우드 주류가 아닌 다문화주의를 타깃으로,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영화들을 시도해 왔다”며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입장에서 한국적인 요소, 우리의 정체성에 힘을 실었을 때 어떤 파급력이 나올지 실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경범 CJ ENM 영화사업부장. CJ ENM 제공

그러면서 “A24는 문화적 다양성에 열려있기에 방향성 면에서 우리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서로 잘하는 부분을 활용해 강점으로 만드는 동시에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협업이었고, 작은 영화가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자평했다.

대기업인 데다 대규모 상업 영화를 주로 만들어 온 CJ ENM이 신인 감독의 독립영화에 투자한 것을 일각에선 의아하게 여기기도 한다. 이에 대해 고 부장은 “영화 사업에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선 블록버스터 영화로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하는 전략을 취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처음에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하면서 어떤 전략을 쓸지 고민했다”며 “미국 시장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위 주류 영화를 기획한다면 효과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미국 대형 제작사와 협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류 영화에 속하지 않는 작품에 대한 수요가 최근 비가역적으로 커져서 시장에 들어갈 공간이 넓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소재,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작품으로 시도했다”고 덧붙였다.

로이드 대표는 “‘CJ ENM과의 협업은 값진 경험이었다. 송 감독의 비전을 최대한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면서 협업의 힘을 느꼈다”면서 “송 감독의 아름다운 비전을 영화로 보여줄 때 반드시 ‘최고의 버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껏 한국 제작진, 배우와 협업한 작품들이 디아스포라 색채가 강했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로맨스를 다루며 보다 보편적인 느낌을 준다. 로이드 대표는 “사랑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감정이다. 송 감독은 사랑이란 감정을 포착해 사려깊은 관점으로 풀어내고,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정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냈다”며 “영화적인 기교가 대단하다. 작품의 소재인 ‘인연’은 한국어 단어지만 그 개념이나 느낌, 경험은 전 세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 부장은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패스트 라이브즈’도 함축된 형태로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린다”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주인공 나영(그레타 리)이 해성(유태오)을 만나는 장면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뿌리와 만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A24는 10년 전 독립영화 배급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제작·배급하는 작품의 규모를 제한하지 않는다. 로이드 대표는 “작가주의 감독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대중에 알린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서 영화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것”이라며 “우리의 지향점은 ‘월드 클래스’ 창작자들이 마음껏 그들의 비전을 스크린으로 쏟아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성장하며 단단한 팬덤을 구축해 왔기에 A24는 더욱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었다. 로이드 대표는 “미국에선 우리가 작품을 상영하면 ‘A24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보러 왔다’고 하는 관객이 60%나 된다. 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받는 회사가 됐고, 지난해 ‘트리플 A24’라는 멤버십 서비스도 시작했다”면서 “우리는 창작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아리 에스터 감독과는 ‘유전’(2018), ‘미드 소마’(2019), ‘보 이즈 어프레이드’(2023) 등의 영화를 같이 했고 다음 작품도 함께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A24는 그 무대를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른 장르까지 넓혀가는 중이다. 로이드 대표는 “창작가가 본인의 비전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편안한 집을 마련해주고 싶다. 장르나 형식을 불문하고 영화, 다큐멘터리, TV 프로그램, 출판 등 여러 방면에서 콘텐츠의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최근 오프 브로드웨이에 있는 한 극장에 투자해 크리에이터들이 마음껏 찾아와 시를 읊고 연극을 올릴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제작자의 시각에서 꼽은 ‘패스트 라이브즈’ 최고의 장면을 물었다. 로이드 대표는 “뉴욕의 바에서 주인공들이 함께 있는 장면이다. 영화사에서 길이 기억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중한 컷”이라며 “15년간 뉴욕에서 산 입장에서 그 도시의 마법 같은 순간이 드러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세 인물의 가슴 저미는 감정을 보여주면서 여러 관점을 만들어내는 명장면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고 부장은 “영화적으로 가치 있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영과 해성이 택시를 기다리는 롱테이크 신은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 그리고 무한대의 시간을 응축한 것”이라며 “문학이나 다른 장르로 구현할 수 없는, 영화로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준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다.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치열하게 구현했다”고 말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