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도 못 막았다… 8090 ‘은발의 손흥민’들

입력 2024-03-05 04:05
지난달 29일 서울 성동구 응봉체육공원에서 열린 한국장수축구협회 ‘성동구 80대 축구단’ 훈련 경기에서 공격수를 맡은 최고령 선수 김오득(90·11번)씨가 볼 다툼을 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지난달 29일 서울 성동구 응봉체육공원 인조잔디구장. 등 번호 11번 유니폼을 입은 백발의 선수가 공을 차며 단숨에 10m가량을 내달렸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수비수를 모두 제친 뒤 골망을 흔든 건 ‘은발 손흥민’으로 불리는 할아버지 김오득(90)씨였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장수축구협회 소속 ‘성동구 80대 축구단’에서 공격수를 맡고 있다.

대학생 시절 축구부 선수였던 김씨는 70세 이후에도 “공을 더 차고 싶다”는 생각에 청·장년층이 주축인 조기축구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김씨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노인들이 모여 장수축구협회를 결성한 지 19년째. 김씨는 어느덧 막내에서 최고령 선수가 됐다. 김씨는 “축구할 때는 나이가 제일 많지만 제일 건강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임한다”며 “하루 공을 차기 위해 매일 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축구장을 찾은 30여명의 선수는 모두 주름이 깊게 팬 70~90대였다. 현재 막내는 75세 코치다. 이들은 고령에도 볼을 사수하기 위한 격렬한 몸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경기 중 무릎을 다친 한 선수는 “뼈가 부러지는 것이 아니면 이 정도는 선수라면 감수해야 한다”고 웃어넘겼다.

전후반 100분의 경기를 마친 뒤 땀범벅이 된 선수들은 아직도 더 뛰고 싶다고 했다. 노인들은 이곳에서 할아버지가 아닌 선수로 불린다. 공을 차는 순간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고 했다.

이제 더는 선수로 뛰지 못하지만 벤치를 지키고 있는 이도 있었다. 본인 나이를 정확히 모르겠다는 권석희씨는 하체가 불편해져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권씨는 “우리에겐 단체에 소속돼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며 “직접 뛰지 못해도 후배들을 보면서 활력을 얻는다. 집에서 누워만 있는 것과 여기 나와 앉아 있는 건 천지 차이”라고 말했다.

경기를 마친 뒤 기념 촬영하는 모습. 최현규 기자

2005년 설립된 장수축구협회는 성동구 한 팀으로 시작해 현재 전국 123개 팀으로 늘어났다. 가입 조건은 단 하나, ‘70세 이상’이다. 박형호(88) 단장은 “우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국가 의료보험 부담이 더 늘어난다. 이렇게 수천 명의 회원들이 모여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인 생활체육을 향한 사회적 관심은 부족한 실정이다. 김길문(88) 고문은 “창립 초기부터 주변에서 무관심과 회의감으로 일관해 왔다”며 “초고령화시대에 돌입한 상황에서 생존 부양정책에서 벗어나 노인이 생활 자체를 즐겁고 보람있게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신영 기자 spiri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