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요 시장을 수렴하는 키워드는 ‘이지 리스닝’이다. 소녀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남자 아이돌이 음원차트 톱10에 들고, 버추얼 아이돌의 노래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도 듣기 편한 노래로 외연을 넓히면서 얻은 결과다. 강한 이미지의 비비가 아이유를 넘어선 것도 달콤하고 부드러운 신곡 덕분이었다.
28일 오후 3시 기준 음원 플랫폼 멜론의 톱100 순위를 보면 비비의 ‘밤양갱’이 1위, 아이유의 ‘러브 윈즈 올’이 2위, 투어스의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가 3위, 르세라핌의 ‘이지’가 4위, 태연의 ‘투 엑스’가 5위를 차지했다. 그 뒤는 임재현, 라이즈, 이무진 등이 이었다.
강렬하면서 빠르고, 고음 등으로 기교를 뽐내는 곡들은 음원 차트 상단에서 보이지 않는다. 최상단에 있는 곡들은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이지 리스닝’ 장르라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이유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지난 26일 새 미니앨범을 발매한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의 타이틀곡 ‘웨이 포 러브’가 24위에 오른 점이다. 2D 캐릭터의 모습을 하고 있어 대중이 반응하기엔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청량하고 편한 음악들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노래로써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태생적 장벽을 넘어선 셈이다.
이처럼 최근의 가요 트렌드가 이지 리스닝에 주목하는 건 K팝 시장과 대중의 수요가 맞물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K팝 시장을 해외로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라이트 팬(특정 가수의 음악을 가볍게 소비하는 팬)이 필요해진 기획사들이 대중 접근성이 좋은 이지 리스닝 장르의 곡을 내놓기 시작했고, 강렬한 곡들에 피로감이 쌓여있던 대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이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최근 몇 년 사이 K팝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내수 시장은 성장 한계점에 도달했다. 해외 시장 확대를 위해선 드라마틱한 음악보다 대중을 더 파고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대형기획사의 기획력과 자본력이 더해진 투어스와 라이즈가 성공을 거뒀고, 비비의 ‘밤양갱’은 대중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곡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제대로 치고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듣기 편한 음악으로의 변화는 일시적 현상은 아니다. 특히 2022년 뉴진스가 데뷔 이후 크게 성공하면서 아이돌 그룹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진스는 기존 걸그룹이 강조하던 걸크러쉬, 세계관 등을 배제하고 1990년대 레트로 분위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르세라핌이 최근 발매한 ‘이지’ 역시 퍼포먼스 위주의 강렬하고 빠른 비트였던 이전 곡들과는 달랐다.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있는 르세라핌의 영어 곡 ‘퍼펙트 나이트’도 마찬가지로 이지 리스닝 장르다.
음원 강자 아이유를 꺾고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비비의 ‘밤양갱’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특별할 것 없는 가사 사이에 툭 불거져 나온 ‘밤양갱’이란 단어로 곡을 입체적으로 만든 비비의 ‘밤양갱’이 대중적 입맛에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임 평론가는 “‘밤양갱’은 CM송 같은 느낌으로 후크(후렴구에 위치하는 짧은 구절)가 강해서 대중적으로 다가가기가 쉽다”며 “‘밤양갱’의 1위는 대중적이고 선율이 아름다운 음악에 목말라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해석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