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의 우크라이나인 황엘레나(38)씨는 2008년 고려인 황블라디미르씨와 결혼했다. 부부는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미콜라이프에서 자녀 셋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2022년 3월 부부의 집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난민촌에서 산 지 8개월쯤 지났을 때 ‘고려인에게 한국행 비행기표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부는 자녀들을 데리고 2022년 12월 남편의 모국 한국으로 향했다.
24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만 2년째 되는 날이다.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 마을에는 이 부부처럼 우크라이나에서 넘어온 고려인과 가족 등 5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지난 21일 기자와 만난 엘레나씨는 “우리를 자기 민족처럼 받아준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 위험은 없지만 한국에서는 무서운 게 돈이었다. 세 아이 교육비와 건강보험료, 월세 등 고정 지출만 월 150만원이 나왔다. 결국 지난해 3월 남편은 다시 일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 눈물 바람으로 보냈던 남편은 그해 11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겨울 동안 가족과 시간을 보낸 남편은 지난 6일 “올해 11월에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 가자”는 말을 남기고 다시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고려인 다니엘 첸코 알리프치나(38)씨는 2022년 7월 한국에 들어왔다. 우크라이나 크레멘추크에서 살던 알리프치나씨는 고려인 마을의 비행기표 제공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으로 넘어왔다.
알리프치나씨가 버틸 수 있는 건 큰아들 김블라지미르(18)군 덕분이다. 김군은 수요일을 제외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9살 여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
김군은 지난해 12월 고등학교 자퇴를 생각했다. 돈을 버는 게 가정을 지키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조야 광주고려인마을 대표는 방황하는 김군에게 고려인 마을에 재능기부 활동을 하는 문태호(67) 백제장인 대표를 소개해줬다. 지난해 12월부터 주말마다 문 대표에게 일을 배우고 있는 김군은 “고등학교 졸업 후 문 대표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려인 프로센코 라리사(48)씨 고향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마리우폴이다. 50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지역이다. 라리사씨가 살던 아파트에도 미사일이 날아왔다. 라리사씨는 “한국에서 우리를 받아준다는 말에 짐도 없이 몸만 왔다”고 말했다. 라리사씨는 우크라이나인 남편, 둘째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라리사씨는 “러시아에 함락된 마리우폴은 다시 돌아가더라도 제가 기억하던 그 모습이 아닐 것”이라며 “한국은 새로운 고향이자 앞으로 평생 머물 곳”이라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