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의 발견] 시장에서 엿본 오래된 미래

입력 2024-02-24 04:01

예산에 도착했을 때 푸슬푸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주 서귀포 우리 동네엔 매화며 유채가 잔뜩인데 육지에도 슬슬 봄이 오려나. 삽교천을 따라 달리다가 예산 읍내로 접어들었다. 예산시장 가는 길이다. 찾는 사람이 적어 찬바람만 불던 예산시장에 청년들이 돌아온 건 지난해 봄. 예산이 고향인 백종원 대표는 성공과 예산 투입에 반신반의하던 예산군을 설득하고 힘을 합쳐 80여곳 점포 중 오랫동안 비어 있던 32곳에 청년들의 창업을 도왔다. 예산 사과, 국수 등 지역 원물을 활용한 메뉴를 개발하고 운영 시스템을 만들고 기존 시장 분위기를 연결해 레트로한 디자인을 적용하는 등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듯 성공했다. 예산군은 2023년 4월 시장 재단장 이후 연말까지 300만명이 다녀갔다고 알렸다. 내가 찾은 그날도 평일임에도 비가 내리는데도 시장 안은 꽤 북적였다. 지역의 오래된 시장이 시끌벅적한 장면은 언제 봐도 신난다. 마침 예산시장 밖 주차장에선 100년이나 되었다는 예산 오일장(5, 10일)이 섰다. 비로 인해 상인들이 덜 나왔다지만 겸사겸사 오일장 곁들여 시장을 찾은 방문객들은 생글생글하다. 예산시장은 독특한 구조다. 80여개 대여섯평 작은 상점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은 시장 안 광장에서 만난다. 광장에는 100개쯤 낮은 테이블이 깔렸다. 시장 안팎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다. 가게마다 백종원 사진이 잔뜩 붙었다. 백종원 막걸리도 팔고 맥주도 판다. 예산 국수가 꽤 유명하다기에 광장 앞 국숫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한 그릇에 6000원,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문 착한 가격이다. 사과 카스텔라 파는 집은 시장이 문 여는 11시부터 긴 줄을 늘어섰다. 예산 쌀과 사과로 담근 막걸리, 사과빵, 사과약과 등도 눈에 띈다. 다만 말끔히 단장된 새 점포들 사이 기존 상점들 그리고 골목마다 작은 좌판을 깔고 앉은 늙은 상인들의 부조화를 못 본 척하긴 어렵겠다. 이왕 하는 거 기존 점포와 좌판 상인들까지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좋았겠지 싶다.

시장을 나와 짧은 건널목을 하나 건너면 예산 읍내의 중심지였던 ‘본정통’ 길로 연결된다. 예산은 충남의 교통 요지였다. 한때 15만명 인구를 자랑했지만 여느 지방 소도시가 그러했듯 쇠퇴해 인구 8만명으로 떨어졌다. 번성했던 도시의 시간은 오래된 상권에 흔적으로만 남았다. 본정통 골목길 상점들은 곳곳이 비었다. 예산 도시재생센터에서 운영하는 공간 정도에만 온기가 돈다. 예산시장의 활기가 곧 길을 건널 수 있을까. 예산시장의 성공을 경험했으니 이를 잘 살린다면 도시는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장사꾼들의 열정이 시장 밖으로 이어져 지속가능한 지역 산업으로 이어지길. 그리고 청년들이 신나게 일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예산군과 지역 어른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다면 1100년 동안 ‘예산’의 이름으로 이어온 이곳은 지속가능한 도시로 앞으로도 지도 위에 단단히 남을 것이다.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