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독일인 의사, 고종의 시의(侍醫) 리하르트 분쉬박사
[쿠키 건강] ‘고종의 시의(侍醫)’ 분쉬(사진). “한국인 의사 6~7명이 날마다 황제를 진료하고 있습니다. 이 의사들은 황제의 양팔을 매우 진지하게 진맥하는데, 진맥이 끝나면 1/4리터나 되는 괴상한 약을 마시게 하는 것으로 진료를 마칩니다. 그렇게 하여 황제는 그날 겨우 회복하고 다음날 똑같이 진찰받고 약 마시기를 반복합니다…(중략)…저는 황제에게 생활방식이 잘못돼 그런 감기에 걸린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황제는 어려운 정무를 수행하는 동안 내내 지독하게 열을 뿜는 두 쇠난로 옆에 앉아 있는답니다. 황제가 집무하는 공간의 바닥은 차고 벽은 미닫이문으로 돼 있으며, 기름종이로 가장자리를 둘러쳤습니다. 황제는 낮에 잠을 자고 오후 3시에 일어나서 새벽 3~4시나 동틀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 있으며 가끔 마당을 가로질러 궁 안의 이 건물 저 건물로 건너 다닌다고 합니다. 쉽게 차가워지는 비단 옷만 입고 있는 것도 발병의 원인이었습니다.”
고종의 시의였던 리하르트 분쉬박사(Richard Wunsch: 1869~1911)가 고종황제의 감기에 대해 남긴 기록의 일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독일인 의사인 분쉬박사는 1901년 11월 입국해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4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분쉬 박사는 대한제국 설립 이후 황제국에 걸맞은 어의 초빙 계획에 따라 정식으로 초빙된 최초의 의사였다. 분쉬는 스승인 헬페리히 교수와 도쿄 대학에서 내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벨츠 박사의 주선으로 한국에 왔는데, 당시 분쉬의 내한에는 외세와 얽힌 복잡한 정치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 독일, 미국 등 열강의 인물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고 자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고 이에 분쉬가 시의로 초빙된 것이었다.
분쉬박사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의 상황을 일기와 편지로 자세히 기록했다.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당시의 한국을 바라보면서 남긴 그의 기록은, 역사적으로도 귀중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수술은 분쉬, 외과수술에 탁월한 의사로 이름 떨쳐
분쉬박사는 당시 ‘수술은 분쉬’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장 인기 있던 의사였는데, 윤치호의 부인을 치료한 후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날리면서 현재의 구급차 비슷한 것을 운영하며 환자를 돌봤다. 분쉬는 개업의로서 상당히 많은 진료활동을 했는데, 당시 내번족수술, 홍채절제술, 다리절단술, 코수술, 흉골절제술, 복부수술 등 다양한 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환자들은 진료비를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약 한 병을 선물로 받는 것을 예사로 알고 있습니다. 대신 물건을 지불하는 경우도 흔했는데, 어떤 외과 수술 환자는 닭 열 마리와 달걀 100개를, 진통이 3일간 계속되는 난산의 해산을 도와주고는 대가로 참외 한 개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진료비 개념이 없었고, 환자들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진료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분쉬는 그의 일기에 우리나라에 머물던 기간 중 후반기에는 매일 서른 명 이상의 환자가 찾아올 정도로 진료가 많았으며, 환자의 대부분은 약값을 치를 돈조차 없었고 심지어 자신들이 마치 자선 사업을 베풀고 있는 것 같은 태도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료정책가 분쉬, 의료청 신설, 전염병 보고제 확립 등 제도 개선책 제안해
분쉬는 1902년 서울에 설립된 육군위생병원의 고문으로 위촉 받았고, 그 해 여름 콜레라가 만연하자 보건정책과 방역대책을 수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콜레라 방역에 필요한 항목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다음과 같은 건의문을 내부대신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 배수로와 하수구를 적어도 매주 2회 청소하고 석회수로 깨끗이 닦아야 합니다.
- 군인을 포함한 궁내의 모든 사람은 반드시 볼일을 화장실에서 봐야 합니다.
- 사람의 모든 오물을 처리하는 일정한 용기가 새지 않는지 점검하고 파손되었을 경우는 적절한 것으로 대치해야 합니다.
당시 그가 위생정책으로 건의한 내용을 보면,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을 시내 지도에 표시해 전체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도로청소와 오물 수거제도 조직 및 공동우물의 위생관리, 콜레라 확산 방지를 위한 예방접종, 석회를 정부에서 공매해야 한다는 내용 등 당시 상황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구체적인 제안들이 담겨 있다. 이 외에도 분쉬는 현대식 병원을 설립하고 의학교육을 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재정후원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분쉬의학상, 분쉬박사 기념해 제정, 올해로 20주년 맞아
열악했던 한국에 서양의학을 전수하고 현대의학이 이 땅에 정착하는데 초석 노릇을 했던 분쉬박사의 활동은 역사 속으로 묻힐 뻔 했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한국 의료계에 알려지게 됐다. 고종의 시의 임기를 마친 후 1911년 분쉬 박사가 별세하자, 부인과 자녀들은 독일로 귀국을 하게 된다.
이 후 분쉬 박사의 딸인 클라우센 여사가 분쉬 박사가 남긴 편지와 일기를 정리해 독일에서 ‘동아시아의 의사(1976)’라는 책으로 출간을 했다. 당시 독일에서 문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김종대 교수(단국대 명예교수)가 클라우센 여사를 만나게 되어 책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 책의 번역본을 국내에 출간하면서 분쉬 박사의 업적이 비로소 소개됐다. 이에 대한의학회)와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1990년에 ‘분쉬의학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분쉬 박사의 편지와 일기를 세상에 공개했던 클라우센(Dr. Gertud Claussen-Wunsch) 박사는 1회 분쉬의학상 시상식을 앞두고 별세해 아쉽게도 시상식을 보지 못했고 대신 레겐겐스부르크 대학 의대 교수와 비스바덴 치과 개업의로 활동하던 외손 두명이 참석했었다.
분쉬 박사의 자손들과 한-독 양국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제정된 분쉬의학상은 지난 20년간 수상 후보자에 대한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로 대한민국 최고권위의 의학상으로 성장해왔다.
현재 분쉬의학상 수상 후보자들의 업적은 계량화된 1차 심사와 연구의 집중도, 중요성 등을 포함한 2차 심사로 나누어 실시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연구논문의 평가에는 SCI 영향력지수 (Impact Factor)가 중요한 평가척도로 사용되지만, SCI 영향력지수는 학술지에 대한 종합평가일 뿐 논문에 대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유수한 학술지에 실렸다고 해서 그 논문의 가치를 바로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한의학회에서는 H-Index라는 지수를 도입해 논문의 질적인 측면을 계량화해 평가하고 있다. H-Index는 쉽게 말해 1편의 논문이 100회 인용된 것과 10회의 논문이 각각 10회 인용되어 100회 인용된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하기 위해 고안된 지표로, 특정 저자의 전체 논문 수와 피인용수를 바탕으로 과학자의 연구성과와 공헌도를 하나의 수로 나타내는 척도이다.
이러한 심사과정을 통해 분쉬의학상은 지난 20년간 대한민국 의학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수상자들을 배출했으며, 그런 이유에서 의학자들 사이에서도 영예로운 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수 기자 juny@kmib.co.kr
정식으로 초빙된 국내 최초 외국인 어의(御醫)는?
입력 2010-11-24 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