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훈 칼럼] 정부의 황당한 의료정책

입력 2010-06-16 10:03

<글·박종훈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

[쿠키 건강칼럼] 정부는 올해 안에, 아니면 늦어도 내년부터 기존의 의료기관 평가제도를 인증제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당장은 관련법이 국회 승인을 받지 못해 시행시기가 불투명하지만 자신 있어 하니 시간문제일 것이다.

인증제 논의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최소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듣도 보도 못했으며 1년 전 2곳의 대학병원이 미국식 JCI 인증을 받았을 때도 정부와 관련 학회인 QA학회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과 수개월 만에 인증제추진단을 구성하고 새로운 인증평가제도라는 것을 내 놓았는데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렇게 못마땅해 하던(공식적인 표현은 아니었지만) 미국식 JCI 인증제를 완벽하게 카피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미국식 제도를 그대로 흉내 냈다고 해서 우리나라 의료기관을 세계적인 병원이라고 국제사회가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정부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형병원들이 직접 미국으로부터 국제인증을 받으려고 하자 아마도 ‘그동안 의료기관 평가와 관련해 정부가 과연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책을 받은 탓인지 서둘러 인증제를 도입하고 나아가 이 제도 자체를 국제인증 받겠다고 계획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 모든 병원급 의료기관들에게 적용되는 제도를 불과 수개월 만에 남의 나라 제도를 그대로 복사해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복지행정의 일천함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에 다름없다.

그 어떤 시기보다 우리 사회는 지적재산권에 대해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만일 정부 부서 컴퓨터에 정품이 아닌 복제품을 깔았다면 어찌 될까. 하물며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는 제도를 제정하는데 있어 외국 제도를 완벽하게 카피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복잡한 도표를 들이대면서 기존 의료기관 평가제도를 바탕으로 했다고 주장하지만 JCI 인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한 눈에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임을 알아볼 수 있다. 단언컨대 100% 복제품이다.

발표장에서 객석의 한 참석자가 “저렇게 베껴도 괜찮은가?”라고 묻자 “외국기관에 물어보니 별 대답이 없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정부가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사실 미국식 인증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몇 개 병원이 인증 받아본 경험은 있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 나라의 제도를 일순간에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식 인증제는 오랜 세월 경험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제도다. 그 사회에 맞게 수정되고 개발되기를 수없이 반복한 것인데 문화도 의료제도도 판이하게 다른 우리가 불과 수개월 만에 남의 제도를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식 인증제는 분명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 형식적이지 않고 의료의 질적인 부분, 특히 의료사고와 관련된 환자의 안전을 추구하는 장점이 있는 것은 분명 맞지만 이 제도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가 있다.

우선 국내의 모든 병원이 인증제가 추구하는 목표를 정확히 인식해야 하며 그에 걸맞는 인프라 구축 등 병원의 시스템 변화가 전제돼야만 한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기관들은 이러한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다. 각 병원의 의료 질 관리를 담당하는 QI 담당자의 숫자나 실제로 하는 업무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처럼 생소한 새로운 제도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기간과 설명, 자문 등이 필요한데 정부는 기존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면서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만 하고 있다.

인증제를 제대로 안다면 이런 소리는 절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증제는 형식이 아니라 포괄적이고 실질적 내용을 담기 때문에 절대 단기간에 준비할 수 없다. 미국식 JCI 인증을 위해서는 미국 전문가 그룹으로부터 수차례 직접적인 컨설팅과 자문을 얻은 후 유능한 인재들로 TF 팀을 구성하고도 아무리 못해도 2년 반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인적 자원이 풍부한 대형병원도 이럴진대 하물며 모든 면에서 열악한 중소병원들이 순식간에 자문 한번 구하지 못하고 이 제도를 수용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 정부가 시행하고자 하는 인증제는 병원들이 자율적으로 포괄적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 하지만 미국식 인증제는 병원이 마음대로 규정을 정하고 그에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책 당국자는 병원이 마음대로 규정을 정하면 되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문제가 있는 발언이라고 경고를 해도 그렇게 말한다.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시장의 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 충분한 자문을 구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자문을 구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실행조직에 미국식 인증제를 경험한 실무자들을 포진하고 그들에게 기술적 사항만을 그대로 베끼게 한 것이다. 정작 정책방향은 인증경험이 전혀 없고 임상현장에서 국내 병원의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한 정책학자들과 당국자가 만들어낸 급조된 작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이 제도를 위해서는 정부나 의료업계와 전혀 연관 없는 독립된 기관이 설립돼야 하며 이 기관은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은 심사자들과 일선 병원을 지도할 컨설턴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선행조건인데 “차차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이런 식의 정책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강제로 시행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행한 제도가 제대로 된 것이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인증제라는 좋은 제도가 일부 정책당국자들에 의해 졸속으로 시행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발표로 인해 얼마나 많은 병원 담당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지 아는가.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정책 당국자의 말에 그거 기가 막힐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