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박종훈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
[쿠키 건강칼럼] 인구가 많지 않은 농촌에 산부인과 의원이 한 곳 있었다. 젊은 사람이 드물다보니 출산율이 저조한 것은 당연한 일. 보건소는 산부인과를 방문하기조차 어려운 지역 주민을 위해 간호사로 하여금 순회 산부인과 진료를 시도한다.
여기까지는 누가 봐도 잘 하는 행정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지역 의사회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산부인과의원의 환자 수 격감을 걱정해 보건소에 순회 진료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소식을 들은 지역 주민들은 의사들이 이기적이라고 질타하고 보건소는 지역 주민들과 기관장의 지원을 바탕으로 아무 문제없이 사업을 지속한다.
이 사례는 가상의 시나리오지만 현재 우리나라 보건행정 스타일을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실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결과는 어떨까? 그나마 하나 있던 산부인과의원은 경영악화로 인해 폐업하게 되고 그 지역은 산부인과의사가 한명도 없는 곳이 된다.
보건소는 소극적 산전관리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만과 같은 적극적 진료는 감당할 수 없기에 결국 주민들은 대도시로 나가 분만해야 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
전문가단체의 의견이 비전문가들의 상식적 사고에 묻혀 버린 탓에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전문가의 의견이 무시될 수 있는 것은 비전문가에 비해 전문가의 수가 훨씬 적을뿐더러 비전문가의 견해가 일반인들에게는 훨씬 쉽게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가 그룹이 사회적으로 가진 자에 속하는 경우 정책 당국자들이 다수의 감정을 따르는 정치적 판단에 휩쓸릴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됐을 때를 회상해보자. 의약분업은 사실 의료계에서 그 이전부터 주장해 온 제도다. 그런데도 막상 정부가 의약분업을 추진하려 하자 의료계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보험재정으로는 의약분업 시행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추가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고 졸속시행으로 인해 결국 보험재정의 부실을 낳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의료계의 이러한 목소리는 약가로 인한 마진 손실을 우려하는 의사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주장이라는 여론의 질타만 받았다.
이후 수년이 지나면서 의료계는 당시의 투쟁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당시 의사들은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국민들이 의외로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것에 당황했고 분명 옳은 주장임인데도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을 뿐 의료현장 곳곳에서 의료인과 환자간의 대화가 원활하지 못했던 결과이며 그만큼 의사들과 환자의 괴리감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학생 때부터 타인의 생각을 읽고 배려하는 과정이 결여된, 다시 말해 다수를 제치고 혼자 일등을 해야만 하는 방식에 익숙한 의사들에게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법을 기대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또 성향 자체가 활달하고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성적·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의료를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경계대상이 되기 때문에 의사들의 진정성이 제대로 평가 받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제약 관련 리베이트 쌍벌죄를 보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사들의 대국민 호소력이 거의 제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리베이트를 제공한 제약사와 받은 의사를 공히 처벌한다는 쌍벌죄 규정에 대해 단 한명의 국회의원도 의사들의 처지와 이 법의 통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국내 제약산업의 왜곡현상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리베이트는 근절돼야 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 사회통념에 비춰 너무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고 그동안의 관행과 현실을 무시한 부분이 상당했는데도 의료계의 경고는 역시 돈 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의사들이라는 비난 속에 묻히고 말았다.
결국 리베이트 쌍벌죄는 뒷돈 받는 것에 연연하는 의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가는 대표적 법률로 인식되고 의사들은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의사회원들은 연일 집행부의 무능을 질타하고 우리 사회의 미숙함에 분노하고 있지만 글쎄, 이것이 정말 집행부와 사회의 잘못일까.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 사회가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의사들의 주장이 매번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매도만 당하는 것은 바로 의료계가 사회의 의사소통에 결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의료계는 이를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의료계의 치명적인 정치력 부재를 통감하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건의료정책은 반드시 의료계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다시 말해 의료정책만큼은 전문가인 의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 형성되게끔 정치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절대적으로 존경받는 집단은 없다. 제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진실이 통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사회와 의사소통에 적극 나서야만 한다. 그 길만이 앞으로 의료계가 살 길이다.
[박종훈 칼럼] 대중과의 교감 실패한 갇힌 의사회
입력 2010-06-09 1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