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 6명이 ‘쩔쩔’… 주취자에 뺏긴 치안

입력 2024-02-16 04:07

설 명절을 앞둔 지난 8일 오후 9시40분 서울 강남의 한 파출소. 만취한 20대가 경찰 부축을 받으며 파출소에 들어왔다. 토사물로 범벅이 된 주취자 1명에게 경찰관 6명이 달라붙었다. 이들은 구토용 비닐봉투를 깔고 토사물을 치웠다. 몸을 가누지 못하던 주취자는 곧 “토할 것 같다”고 했다. 곧바로 경찰 2명이 그를 부축해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경찰관 A씨는 “이런 주취자 1명 때문에 치안 공백이 생기는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취자 뒤처리에 낭비되는 경찰력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주취자로 인한 출동 건수는 95만8602건을 기록했다. 만취한 사람을 위해 경찰이 투입되는 건수가 연간 100만건 가까이 되는 셈이다. 주취자 출동 건수는 2019년 99만8872건을 기록했다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인 2020년(88만6518건)과 2021년(78만1642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2022년 96만4125건으로 다시 급증했고, 지난해도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경찰이 주취자 처리로 몸살을 앓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욕설·폭행에 시달리는 일도 많다. 2022년과 지난해엔 귀가 조치한 주취자가 사망하는 사고까지 발생하면서 경찰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지난해 2월 경찰은 ‘주취자 보호조치 개선 TF(태스크포스)’를 꾸리고 매뉴얼 개선 작업에 나섰다.

경찰이 주취자에 대한 의료적 판단까지 해야 한다는 내용의 ‘체크리스트’가 담긴 1차 매뉴얼이 배포되자 반발이 쏟아졌다. 보완을 거쳐 지난해 8월 최종 매뉴얼이 전국 관서에 전파됐지만 현장 애로사항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국민일보가 1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김웅 국민의힘 의원실로부터 제출받은 매뉴얼을 보면 경찰의 의무사항은 대폭 축소됐다. 하지만 119구급대원이나 의사가 응급한 주취자가 아니라고 판단할 경우 ‘위험성이 해소될 때까지 최소한도 내로 보호한다’는 조항은 남아 있다.

강남의 한 파출소 팀장은 “주취자가 인사불성이라 집 주소를 대지 못하면 보호자에게 인계하기 위해 휴대전화 연락처를 뒤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시비를 걸어올 때가 있다”며 “이런 상황에 적극 조치할 수 있는 매뉴얼이 생기면 부담이 덜할 것 같다”고 했다. 다른 파출소 팀장 역시 “주취자에 대한 119구급 요청을 거부당하면 순찰차로 이동시켜야 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며 “현장 상황이나 주취자 유형이 너무 다양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응급의료센터와의 협업을 강화하고 응급실 내 주취해소센터를 확충하는 등 대책을 마련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시 도경찰청에서 연계를 맺은 응급의료센터는 20곳에 불과하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국회든 정부든 입법을 통해 의료기관과 국민 보건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에서 적극적으로 주취자 대응 기능을 맡도록 해야 한다”며 “‘맨땅에 헤딩’ 식으로 경찰이 매뉴얼을 만들고 대응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가현 정신영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