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는 이후 20년 넘게 고생을 하다 2010년 6월 28일 주님 곁으로 떠났다. 평생을 목회 핑계로 밖으로만 돌아다녔을 뿐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것 같아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가 지역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하자 교인을 돌보는 일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목회자 모임이나 교회 연합회 모임 등에도 종종 나가 목회자들과의 교류와 연합에도 힘을 쏟았다. 또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해 집중했던 사역이 있었는데 바로 평신도를 교육하고 미래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한인성경연구원(KITE)을 세워 평신도 교육 사역을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 과정을 밟던 1985년부터는 이 학교 강사로 강의도 했다.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15년쯤 흐른 96년 내게 또 한 번의 변화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한국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현 아신대)로부터 선교대학원장 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65세가 되면 은퇴하려던 참이었는데 은퇴 2년여를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한철화 박사님께서는 ACTS 총장님으로 사역 중이셨고 나는 미국의 기독교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 회장을 맡고 있었다. 한 박사님은 경기도 양평의 ACTS 캠퍼스에 선교대학원 건물 건축을 추진 중이어서 모금 등을 협조하러 우리 교회를 여러 차례 찾으셨다. 이후 순수 KWMC 헌금을 통해 ACTS 선교대학원 건물이 건립됐다.
그렇게 해서 ACTS 선교대학원장을 맡은 뒤 2년 뒤인 98년 2월 21일 ACTS 이사회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한 박사님의 후임으로 ACTS 총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었다. 난 당시 독일 베를린의 한인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 중이었다. 한인연합교회 당회와 의논한 끝에 그해 9월로 예정된 교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떠나기로 했다. 당시는 아내가 병환 중인 데다 나 역시 4년 전 얻은 신장결핵이란 병으로 큰 수술을 받고 난 뒤였다. 쉼 없이 달려온 오랜 목회 사역으로 심신이 많이 지쳐 있던 때였다. 결국 총장직을 수락했고 98년 3월 1일 법적으로 ACTS 총장에 공식 취임했다. 이후 6개월간은 한인연합교회 창립 예배 준비와 ACTS 총장직을 겸임했다. 미국과 한국을 거의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두 나라를 오간 끝에 그해 10월 1일 한국에 다시 정착했다. 67년 미국으로 유학 오며 한국 땅을 떠난 지 31년 만이었다. 마치 낙하산처럼 대학교 운영을 맡게 되니 마치 ‘고양이가 소머리를 맡은 꼴’이 된 기분이었다. 목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일 큰 어려움이 재정 마련이었다. ACTS는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신학교였고 순수 독립 신학교이다 보니 총장이 직접 나서서 모금해야만 학교 운영이 가능했다. 당시 ACTS 교수님들의 학력과 경력 수준은 그 어느 신학대학보다 높았다. 전임 총장이셨던 한 박사님이 구축한 강도 높은 학문과 선교 연구 체계, 그리고 철저한 경건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크게 다가왔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