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맞아 고궁 입장료가 무료라고 하길래 거기나 구경 가 볼까 하고 있는데 아내가 배우 류덕환이 기획한 전시회 티켓을 예매했다. ‘배우도 작가나 감독처럼 저작권을 가질 수 없을까’라는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배우 류덕환이 인터뷰어로 나서고 천우희, 지창욱, 류승룡, 박정민 등 네 명의 인터뷰이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걸 찍어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이색 전시회였다.
보통 배우의 인터뷰는 그가 출연하는 작품이나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이건 아무런 상업적 이슈 없이 그 사람이 가진 평소 생각과 자세를 묻는 기회라 약간은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NONFUNGIBLE : 대체 불가능한 당신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입장료가 이만 원이었는데 유명인들이 나와서 그런지 줄을 서야 할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방마다 돌면서 배우 한 사람씩 진행된 인터뷰와 퍼포먼스 필름을 보는 형식이었고 길이가 짧아 중간부터 보아도 내용을 따라잡는 데 무리가 없었다. 배우들의 솔직하고 새로운 면모와 아우라를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류승룡은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느라 박노해의 시를 예로 들고 공자의 에피소드를 현대식으로 바꿔 소개하기도 했다. 박정민 역시 소심하고 부정적인 척하는 반어법으로 자신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연기자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인공지능(AI)이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 불가능한 직업 중 하나가 이런 ‘노력하는 배우들’이라는 깨달음과 더불어 2년 동안 놀았다는 류덕환이 그동안 그냥 놀기만 한 게 아니라 이렇게 새롭고 놀라운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말로는 논다고 하지만 남다른 사람들은 계속 숨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류덕환이 얘기한 ‘배우들도 저작권을 가질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배우들 중에는 작사·작곡 등이 가능해 뮤지션을 겸하는 사람이 있고 래퍼로서 공연과 저작권 수익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렸을 때부터 음악 수업을 받았거나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경우에 한한다. 더구나 배우는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상대적으로 어렵다. 류덕환의 질문 중 ‘스피커로서의 배우’라는 항목도 있었는데 스스로 말하는 자의 위치에 오르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게 임세미 배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 인연도 있지만 나는 바람직한 직업관이나 뛰어난 연기력만으로도 그를 높이 평가한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세미의 절기’의 구독자이기도 하다. 태양력을 기준으로 24분 한 절기마다 동영상을 찍으며 우리가 잘 모르는 입춘, 한로, 상강 등 절기의 숨은 뜻도 가르쳐주고 절기에 맞는 제철음식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브이로그 방송인데 비건이자 해양생물 보호단체 ‘시셰퍼드’ 단원인 그의 생각과 실천들이 멘트와 자막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인스터 팔로어가 백만 명이 넘는 셀럽이므로 그의 말과 글은 충분히 ‘스피커’ 역할을 하며 팬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으면 셀럽부터 되어야 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유명인들처럼 여러 가지 매체와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 말고도 강력한 스피커가 되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글쓰기다.
지금 내 주변엔 방송 카메라나 마이크 하나 없이 오로지 글만 써서 스타가 된 사람이 많다. 페이스북이나 얼룩소 등에서 오로지 글만 써서 많은 팬을 확보한 사람들이다. 얼룩소에서 ‘공모에 당선되는 극본 쓰기’를 연재하고 있는 이기원 작가 같은 경우엔 인기가 좋아서 원고료로 받는 금액이 짭짤하다고 만날 때마다 자랑해 남의 속을 긁는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글쓰기는 생각 쓰기다. 글쓰기가 내 삶에 무슨 도움을 줄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그것은 내면의 촛불을 밝히는 심지일 수도 있고 세상에 던지는 작은 폭탄의 심지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열과 성을 다해 꾸준히 쓴 글은 세상과 나를 조금씩 바꾼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부터 그랬으므로 의심 없이 얘기하는 것이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제안서든 뭐든 좋다. 글을 쓰자.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