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상처를 타고 온다

입력 2024-02-16 03:06

지난해 9월 영국 케임브리지대 옛 신학부 건물에서 열린 로완 윌리엄스의 케임브리지대 은퇴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내 가방에는 그의 첫 번째 강의이자 그리스도교 영성사를 기록한 첫 번째 책 ‘상처 입은 앎: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 다시 보기’가 담겨 있었다. 학술대회 일정을 마친 후 윌리엄스가 그리스도교 영성사로 두 번째 강의를 했던 케임브리지 웨스트콧하우스 교정을 부학장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채플의 문을 여는 순간 제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으며 부제로 서품받는 27세 청년 윌리엄스가 보이는 듯했다.

‘상처 입은 앎’ 초판이 출간된 해는 그로부터 2년 후인 29세 때다. 신학자요 성직자로 첫걸음을 내딛던 청년 로완, 이제는 주교직과 학장직에서 모두 내려와 삶을 뒤돌아보는 로완. 놀랍게도 이 반세기의 간격은 일관된 사상으로 연결돼 있다. 책에는 일생을 거쳐 변함없이 흐르는 그의 사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인간과 이 세상엔 기이하고 낯선 질문인 그리스도 성육신과 수난, 부활에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 맡기며 신적 언어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언어를 정화하고 회복하는 여정. 청년 로완에게는 이것이 고전 그리스도교 영성의 정수였다. 노년의 그에게도 여전히 그러하다. 우연적이고 역사적이며 물질적인 창조세계 질서 안으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드러나셨다는 당혹스러운 사실, 바로 그분께서 죽음의 어둠 가운데 부활로 자신의 초월성을 알리셨다는 기이한 사실. 이 사실에 끊임없이 마주하며 그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 세대를 거듭해 새롭게 태어나는 공동체가 그리스도 교회다.

흥미로운 부분은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실현해주는 전능한 아버지’로 투사하는 유아적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판을 의식한 초기 로완 윌리엄스의 강조가 줄기차게 나온다는 점이다. 초기 윌리엄스 사상의 기저에는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을 수용함과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의 면면을 드러내려는 신학적 동기가 흐른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영성에 각각 한 장씩 할애했다. 당대 교회의 자기만족에 저항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성 요한의 ‘어두운 밤의 영성’은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윌리엄스는 영성과 종교가 그리스도교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인간의 모순적 현실을 가열차게 마주하도록 이끈다. 또 성육신이라는 긍정과 수난이라는 부정을 완성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낯선 초월성에 들어가도록 독자들을 초대한다.

차보람 교수(성공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