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잃은 부모의 비통함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아이의 부모는 사고가 난 수양관과 교회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물으라는 주변의 권고에 한동안 주저했으나 결국 소송을 제기했다.
난 그들을 위로해야 할 목사인 동시에 또 피소된 입장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장로님이셨던 다니엘의 할아버지와 온 가족의 기도는 아이들 부부 집사님 내외와 온 교회에 큰 힘이 됐다. 시간이 흘러 그 가정은 결국 교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을까. 그러다 여러 해 전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시련을 이겨내고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4년 전에는 한인연합교회의 묘지 동산도 찾았다. 다니엘의 묘지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묘원을 살 때 “다른 구역은 세월이 흐르면 식구들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이 묘지 구역은 식구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1995년 2월 무렵 북한의 목회자 20여명이 우리 교회를 방문한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미국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에서 기독교계와 불교계 등 북한의 종교인들을 미국으로 초청한 것이다. 북한 교회 목회자들은 하루 정도 한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우리 교회가 선택됐다. 그들은 자신들을 목사라고 소개했지만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성경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랍스터 같은 비싼 음식도 대접해봤지만 얼마나 경계심이 심했던지 잘 먹지도 않았다. 북한과 외교를 맺지 않은 미국 정부는 행여 사고라도 날까 봐 끊임없이 확인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 북한 목사와 같은 차를 타고 호텔로 가게 됐다. 그는 내게 슬쩍 물었다. “목사 동무, 혹시 위 상하지 않는 아스피린을 좀 구해줄 수 없습네까.” 당시는 일요일 저녁이라 약국이 문을 닫아 호텔에 도착한 후 의무실을 찾았다. 다행히 아스피린이 있어 이를 전해주려는데 갑자기 다른 일행이 웅성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 목사는 “우리 공화국에서도 좋은 약 만들고 있습니다. 일 없습네다”라며 손을 뿌리쳤다. 나도 “그러면 거기서 사 드십시오” 하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결국 그 목사는 나중에 다시 내게 다가와 겸연쩍은 표정으로 약을 받아갔다.
삶은 사건의 연속이며 삶의 의미는 그 사건의 해석이다. 이 해석의 원리는 절대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며 이를 버팀목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그동안 여러 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고생은 됐지만, 한편으로는 주님께 가장 가까이 살았던 시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인 수가 많아질수록 이런 마음은 점점 잊히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시무장로님만 10명이 넘었고, 주일 예배를 세 번이나 드려야 할 정도였다. 교회당을 지으며 진 빚은 다 갚았고 선교비와 자선비 예산이 증액되고 부교역자 수도 많아졌다. 난 그저 시스템에 따라 목회만 하면 됐다. 교만하기 딱 좋은 여건이 되자 어느새 목에도 힘이 들어갔다.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야 한다고 했는데 생각의 내용이 빈약해져 갔다. 그러던 1990년 추수감사절 아내가 풍을 앓아 신체 왼쪽이 마비된 채 쓰러졌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