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컵 직후 대회 분석을 하겠다던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돌연 미국으로 갔다. 대한축구협회 수장인 정몽규 회장은 수습은커녕 두문불출하고 있다. 아시안컵 우승 실패의 후폭풍이 점점 거세지는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다.
협회는 13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김정배 상근부회장 주재로 경기인 출신 비공개 임원 회의를 열고 클린스만 감독 거취 여부 등을 논의했다. 당초 예정됐던 협회 5차 임원 회의가 정 회장의 불참 통보로 취소되면서 열린 회의였다.
협회 관계자는 “회의는 지난 아시안컵에 대한 리뷰를 시작으로 대회의 전반적인 사안에 대한 자유토론 방식으로 진행됐다”며 “15일 오전 전력강화위원회가 열린다. 최종적인 결정사항은 조속히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대표팀 사령탑 경질이라는 중차대한 이슈에서 뒤로 숨는 모습을 보여 무책임하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지난해 3월 클린스만 감독 부임 이후 재택근무, 잦은 외유 논란 등은 계속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의 운영방식에 대해 ‘아시안컵 결과까지 기다려보자’는 여론도 일부 있었으나 4강 탈락을 기점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정 회장은 사실상 클린스만 감독 선임을 주도한 인물로 여겨진다. 이미 클린스만 감독은 미국, 독일 등 대표팀 사령탑을 거치면서 지도자로서는 ‘낙제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세계적 스타 출신에 온화한 성품까지 지녀 개성이 강한 대표팀 통솔에 적합한 리더라는 이유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클린스만 감독은 지난해 3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정몽규 회장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2017년 U-20 월드컵에 아들이 출전했을 때부터다”고 인연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감독 선임 과정부터 문제였다는 시각이 많다. 축구계에 따르면 독일 출신 마이클 뮐러 전력강화위원장은 지난해 1월 부임 후 주로 협회 고위층과 긴밀히 소통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위원은 국민일보에 “위원들의 의견은 사실상 크게 반영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보안상 이유’로 사령탑 선임 사실을 뒤늦게 통보받았다는 위원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력강화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외국인 위원장을 앉혀놓다 보니까 위원회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싸늘한 여론에도 협회는 클린스만 감독 경질을 망설이고 있다. 경질은 곧 정 회장이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부정적 여론이 확산할 경우 내년 1월 차기 협회장 선거에서 4선에 도전하는 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우승을 외치던 클린스만호는 기대 이하 성적을 냈다. 하지만 직전 2019년 대회(8강 탈락)보다 좋은 성적을 거둬 위약금을 지급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현재 클린스만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 코칭스태프를 경질하면 약 100억원의 위약금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회는 천안축구센터 건립 등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거액을 지급하기에 난처한 상황이다.
당장 차기 사령탑의 연봉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후보 물색조차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한국은 내달 21일과 26일 태국과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월드컵 2차 예선을 앞뒀다.
감독 경질 문제를 논하게 된 전력강화위가 취지에 맞게 진행될지도 의문이다. 이미 한국을 떠난 클린스만 감독과 일부 위원은 화상으로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협회 한 관계자는 “감독 거취 문제는 워낙 민감해 자문 역할을 하는 위원회가 결정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뮐러 위원장 체제에서 줄곧 진행된 화상 회의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일부 위원들은 “대면회의가 열려도 참석자는 위원회 구성원의 절반도 안 됐다”거나 “중요한 안건을 토의하고 결정하는 자리인데 온라인으로 의견을 듣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등의 의견을 전했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서민위)는 이날 정 회장을 강요와 업무방해,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서민위는 정 회장이 협회 관계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클린스만 감독을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축구 팬들은 축구회관 앞에서 클린스만 감독 경질과 정 회장 사퇴를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펼쳤다. 이들은 “클린스만 감독 선임 배경과 과정, 연봉 기준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박구인 이누리 정신영 기자 captain@kmib.co.kr